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조회수 2020. 4. 5.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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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에는 배달의 민족, 야놀자 등의 다양한 스타트업 기업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시장을 흔들고 새로운 판도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젊은 인재들이 모여 창업을 통해 성공신화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과거 친구들 7명이 단돈 100만 원을 가지고 만든 재계 순위 13위 기업이 있다. 이들은 불과 4년 만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을 키웠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율산그룹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한번 알아보자.

27살에 대그룹을 일궈내다

1975년, 율산실업의 시작은 신선호 율산 사장과 자신의 동향 친구 6명이 함께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젊은 패기와 행동력, 새로운 시각을 토대로 사업을 확장해나아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율산은 창업 초기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첫 수출하면서 성장했다.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으로 인해 하역이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무역선 등을 동원해 납기를 맞췄다. 이들의 행동력에 중동 바이어는 절대적인 신임을 주었다. 이후 중동시장은 율산신화의 기반이 되었다.

창업 첫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율산은 신진알루미늄을 인수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 금룡해운과 동원건설을 잇따라 인수했다. 이는 이듬해 4,300만 달러의 수출을 이뤄낸 율산실업의 성장세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설립 3년 만에 30배 수출성장률을 기록하며 13번째 종합상사로 등극했다. 어느새 14개 계열사, 27개 해외지사 6개 합작법인, 자본금 100억 원, 종업원 8,000명을 보유한 대그룹이 되었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신선호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드라마 '훠어이 훠어이'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율산실업은 1977년 서울종합터미널(1만 8,700여 평)을 서울시로부터 사들이기도 했다. 율산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당시 정권의 수출지상주의 정책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수출업체에 대하여 정권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을 받으면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즉시 현금을 인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은행 대출금리가 25%를 넘나들었지만 수출기업에 한에서는 연 6%으로 유지되었다.

창업 4년 만에 부도 처리

78년 사우디는 외국기업의 도소매업 진출을 법률로 막고 있었었다. 그런데 율산실업이 그 규정을 일부 어겼다. 결국 거액의 벌금을 무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국내에서 “율산이 조만간 사우디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와전된 소문이 흐르기 시작했다. 율산 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단자사들은 자금 회수에 나섰다.

9월 들어 율산은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 이후 구제금융의 도움을 받았으나 별반 효력을 보지 못했다. 결국 율산은 은행관리에 들어가게 되고 율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79년 4월, 신선호 사장이 업무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그러면서 율산그룹 전 계열사가 일괄 부도 처리되면서 그 끝을 맺었다

갑작스러운 부도의 이유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율산실업의 부도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의문을 품었다. 이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 모종의 사건 때문이었다. 79년, 신선호 사장은 3명의 청년에 의해 납치가 될뻔하였다. 하지만 다행히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기지를 발휘해 탈출해 성공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납치 사건이 기사화되었을 때, 신 사장이 납치 과정에 있어 범인들이 청와대 비서실에서 나왔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내용을 전면에 기사화한 것이다.

당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던 청와대 비서실에게 이 사건은 이미지가 더욱 추락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한 재계 중진은 청와대 비서실을 거명한 것은 시대적으로 결정적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이는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당시 서석준 경제수석이 이에 대하여 "참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 이로 인해 율산 처리 과정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했음을 시사했다. 

79년 그룹 부도 후 외부와 연락을 두절했던 신선호 사장은 2000년 서울종합터미널에 센트럴시티를 건설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종합터미널 부지는 76년 서울시가 율산에 매각했던 장소이다. 당시 고속버스터미널 완공 시 소유권이전 등기를 필해주겠다고 제3자 양도를 원천 금지해 놓은 땅이었다.

덕분에 부도 이후에도 채권단에 넘어가지 않고 율산의 자산으로 남았다. 신선호 사장은 센트럴시티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으나 영업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영권과 보유지분을 매각했다. 하지만 2014년에는 한국 1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려 건재함을 보였다. 불과 4년 만에 그룹을 세운 그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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