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 말 듣고 시작해 재계 서열 14위까지, 그리고 몰락

조회수 2020. 1. 29.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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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이 거의 저물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고 있다. 새해가 되면 각종 점집, 사주 카페 등은 문전성시를 이루기 마련이다. 미신임을 알면서도 한 해의 기운을 확인하고 새 마음가짐으로 1년을 준비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심리 때문이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이를 미리 유념하여 대비하고,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기운이 나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즐기는 마음으로 가볍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점 결과를 너무나 맹신하여 흥망성쇠를 겪은 이가 있다. 바로 한보 그룹 창업자인 정태수이다. 대한민국 재계 14위까지 올랐던 대기업 한보 그룹이 점 때문에 시작되었고, 망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심지어 본사마저 터가 좋다는 말 때문에 대기업이 되었어도 은마 아파트 상가 3층에 그대로 자리했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신뢰도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국내 최정상이었던 이 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어버린 이유가 역술가 때문인 것인지, 그 속 사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점쟁이 말 듣고 시작한 창업

한보 그룹의 창립자인 정태수는 원래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사업을 하면 잘 된다"라는 점쟁이의 말에 준비 과정을 거쳐 공무원을 관두고 창업을 하게 된다. 사업 시작 직전 1-2달 치 봉급 정도의 돈으로 폐광을 인수한 그는 1974년 한보 그룹의 모태인 한보상사를 창업하였다. 이후 운 좋게도 미국에서 몰리브덴 생산을 중단하며 떼돈을 벌게 되었다.


자금을 확보한 그는 1975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동 영화 아파트 172가구를 지으며 주택 건설업에 진출하였다. 1976년에는 삼아 건설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진출하였으며, 1979년에는 초석 건설까지 인수하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이에 어느 정도 성장하자 해외까지 건설 사업을 확장하는 데 이른다.


출처: 2차 오일쇼크 당시 모습

그렇지만 그의 성장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건설 도중 규제 조치가 걸려 건설했던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금은 들었으나 매매가 안 되어 위기가 닥쳤던 그는 다시 한번 천운을 통해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당시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화폐가치가 급하락하였고, 부동산이 안전 자산으로 부상하며 은마아파트가 20일이라는 단기간에 완판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거금의 현금 자산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재벌로 성장하였다.

여러 번의 위기

그는 기업의 자산이 축적되자 1981년 그룹 총괄 비서실을 신설하며 기업 집단으로서의 모양새로 갖추어 나갔다. 1982년에는 한보 탄좌 개발을 설립하며 탄광 사업에 진출하였으며, 1984년에는 태화 방직을, 1985년에는 (주)금호 철강사업부를 인수하며 대박을 치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수의 사업 인수를 진행하자 전반적인 사업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시기를 잘 타 성공했던 사업들마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모두 취약해졌다.

출처: 수서 사건 당시 시위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보 그룹은 잘못된 방식인 로비를 시도하였고, 이가 성공하며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 일명 수서사건을 일으켜 공중분해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당시 지방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의 비호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인 로비 성공 사례이다. 이 때문에 주력이었던 주택 부분에서 손을 떼게 되고, 정태수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피해가 상당하였으나 기업은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계획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

1993년 정태수가 총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돌아오고 난 뒤 한보 그룹은 기존의 건설 치중 체제를 탈피하고 문어발식 경영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상아 제약을 인수하였으며, 시베리아 가스전 확보 및 개발에 힘썼으며, 영상 프로덕션 '한맥 유니온' 등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다수의 사업 중 가장 집중했던 사업은 바로 철강 사업이었는데, 그 이유가 충격적이게도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라는 역술가의 말 때문이었다.

이렇듯 한보 그룹은 1995년 부실 건설 업체 유원 건설과 계열사 4개를 인수하기도 하며 사업 다각화를 꿈꿨고, 이는 1996년 정태수 총회장이 구속되어 2세 경영 체제로 승계되면서도 지속되었다. 당시 주요 사업은 러시아 가스전 개발과 제철소 건설로, 시대와 사업성을 잘 파악한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분야였다. 당시 에너지 자원의 필요성이 점차 부상하고 있었으며, 메이저급 철강 기업이 포항제철 하나뿐인 상황으로 국내 시장에서 내수 독점 견제를 위해 대규모의 철강 기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도산에 직격탄이 된 철강 사업

이처럼 좋은 시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강 사업은 한보 그룹을 결국 도산까지 이르게 하는 직접적인 패인이 되고야 만다. 무리하게 계열사를 만들고 인수를 강행하여 내실이 부족한 사업이 증가했고, 이 과정에서 자금이 상당히 소모되었는데, 한보 철강의 제철소 설립에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적자가 발생하자 이를 메꾸기 위해 그들은 회사채를 남발하고, 차입, 어음, 부동산 매각 등으로 이를 충당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에 은행들이 채무를 유예해주거나 긴급 지원을 하는 등 각종 도움을 주었음에도 1996년 말 결국 자금이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계속되는 발생 어음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의 도움을 받던 한보 그룹은 1997년 1월 23일 은행마저 등을 돌리자 주식 포기각서를 내며 도산하게 되었다. 당시 재계 서열 14위이던 한보 철강이 빚만 무려 5조 원을 남기고 망한 것이다.

이를 현재 시점으로 생각해보면 두산이나 한진, CJ와 같은 대기업이 수십조 원의 부도를 내고 공중분해한 격으로 한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보 그룹과 같이 방만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진행하던 다수의 재벌 그룹들이 연쇄 부도를 냈고, 1997년 외환 위기인 IMF가 발생하며 국가 존폐의 위기까지 이어졌으니 그 영향의 크기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의 부도는 무리한 사업 확장 및 철강 집착으로 인한 자금난이 가장 직격탄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 경영, 문어발식 확장 등 압축 성장의 폐해가 있다. 사업 확장 과정에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등 경영방식이 잘못되었기에 기업이 탄탄히 내실을 다지지 못해 결국 붕괴한 것이다. 이에 실제로 한보 그룹은 현재 경영 및 경제 전문가들에게 추악한 이미지로 남아있으며, 공병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보 같은 기업이 되지 않고 영속하려면 기업가는 장사꾼과 다른 생각을 지녀야 한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점 때문에 창업해 대박을 치고, 점 때문에 철강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하게 된 한보 그룹은 이처럼 이미 이전부터 내부의 문제가 상당했던 기업이었다.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토대로 경영한 것이 아니라 돈만을 좇아 각종 비리를 통해 성장하였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에 경영인이라면 정상에서 일순간 추락해버린 그들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자세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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