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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이병철과 정주영 회장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까닭

조회수 2019. 11. 24.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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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병철 회장, 정주영 회장

‘세기의 라이벌’로 유명한 삼성 초대 회장 이병철과 현대 창업주 정주영은 사이가 안 좋았기로 유명하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과 같은 책들도 덩달아 인기 있었을 정도로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아직까지도 국내 대표 라이벌로 불리고 있다.


출처: 둘 사이의 관계를 다룬 책

한국 상공회의소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로는 정주영이 21세기형 CEO 상에는 이병철이 선정되었음을 발표했다. 최빈국 수준이었던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킨 일등공신답게 아직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국내 대표 대기업의 선발주자이며, 한국 경제의 성공 신화인 두 인물에게 왜 이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보겠다.


정주영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가정 형편이 매우 안 좋아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집을 떠나야겠다 결심한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4번의 가출 끝에 겨우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정착까지의 여정에서 그는 인천 부둣가 하역 일꾼, 고려대 신축 공사장의 막노동꾼, 풍전 엿 공장 직공 등 다수의 험한 일들을 겪었다. 이후 왕십리 복흥상회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였으며, 그 당시 나이는 24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이병철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경제적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학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던 그는 20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러나 감기로 인해 22세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1만 원에 지인 두 명이 합자한 돈 2만 원을 더해 총 3만 원으로 정미소를 개업했다. 당시 1만 원은 현재 가치로 12억 정도로, 사업 초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호암미술관에서 예술품 관람하는 이병철 회장

이렇듯 성장 환경부터 다르기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주영은 이병철 회장을 두고 "그래,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도 가 보고, 국보급 골동품을 만지면서 정원에 노는 공작새를 감상하는 고위한 양반이고, 나는 막노동자 출신이어서 무식한 사람이라 이거지"라고 발언할 정도로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둘의 성격 차이는 외형에서부터 드러난다. 순박한 외모에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가진 정주영은 늘 수수한 차림으로 다녀 친근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또한, 평소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여, 트렌치코트 한 벌도 10년 넘게 입고, 구두는 가죽이 다 닳을 때까지 신었다는 것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질 정도이다. 사진 속 그는 거의 점퍼 차림으로 외형이나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 일하기에 적합한 복장을 착용할 정도로 열정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출처: 젊은 시절 이병철 회장과 배우자 박두을

크지 않은 체격에 군살 없는 몸을 소유한 이병철은 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차림을 추구하였다. 그는 언제나 정장 차림이었으며, 바지의 길이도 칼같이 맞추고, 주름은 항상 날이 선 일자 모양에, 꼭 체형에 딱 맞게 재단하여 착용했다. 절제된 식단 관리를 통해 노년까지도 체형 관리를 철저히 한 그의 모습에서는 꼼꼼하고, 냉철한 성격이 드러난다.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보니 화법 역시도 정반대였으며, 경영 방식도 극과 극을 달렸다. 정주영의 화법은 하나하나 설명하는 장황한 타입으로, 말이 긴 편이었다. 그는 조금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정벌 경영 방식을 취했다. 비전이 보이면 고민 없이 바로 일을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설명을 하며 직원들을 이끌어 나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는 모두가 비웃던 대양 수송 계획을 대성공시키며 사업 수완을 인정받아 기업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병철은 충분히 숙고한 뒤 정리하여 말하는 간결한 화법으로, 말수가 적었다. 적은 말수임에도 요지를 정리를 통해 논점을 제시하였고,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렇듯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하였으며 엄격했던 그는 경영에 있어서도 같은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중한 분석과 생각을 통해 결론을 먼저 내린 후 지시하는 황제 경영법을 취했다. 이를 통해 황무지에서 시작한 전자 산업과 반도체 사업을 기술력도 부족하고, 후발 주자로 여러 제약이 있었음에도 전 세계 1위까지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정주영은 정치권력에 지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식 중 6남인 정몽준을 국회에 진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직접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한 것이다. 반면, 이병철은 선친과의 인연으로 인해 이름만 올려놓은 당 때문에 억울하게 정치적 희생양이 된 후 정치는 철저히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업가는 정치와 직접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철벽의 금기로 삼으면서 그의 확고한 의중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외형부터 성격, 화법, 경영 철학까지 모두 정반대인 두 인물의 경쟁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회사를 이끌어갔기에 지금과 같은 한국 경제의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진정한 경쟁을 보여줬던 두 인물의 앙숙 논란은 와병 중인 몸을 이끌고 고희연에 참석한 이병철을 정주영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종결되었다. 평생 1위를 두고 다툰 두 기업인의 정신을 되새겨봐야 할 때다.


글 오아랑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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