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진 재계 10위 기업을 가졌던 남자

조회수 2019. 3. 15. 10: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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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썸네일_조선일보

다리가 뚝 끊어지거나 붕괴하는 일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한강 다리가 무너진 일이 한국에서 발생한 적이 있다. 1994년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10위의 그룹과 한 남자의 인생이 무너지고 말았다.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진 남자 최원석 회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출처: 중앙일보, 헤럴드 경제
순조로운 인생

동아그룹의 회장이었던 최원석 회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2세 경영자다. 신중했던 그의 아버지이자 동아그룹의 창업주 최준문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던 그는 20대부터 사장직을 달고 기업 경영에 뛰어들었다.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사매거진

최원석은 30대에 동아그룹의 주력이었던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을 이끌게 된다. 회사의 명운을 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한 것도 그였고. 성공시킨 것도 그였다. 이후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대한민국 10위의 재벌에 오르면서, 그의 인생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절정기에 이르게 된다.


1. 성수대교 붕괴

원효대교를 서울시에 헌납하고, 쓰레기 매립지로 인천 매립지의 반을 기부하는 등 국내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나가던 동아그룹은 갑작스러운 비보를 맞이하게 된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한 것이다. 성수대교는 동아건설이 1979년 완공한 다리였는데 그 다리의 중앙이 뚝 떨어져 내렸다. 지금의 성수대교는 기존의 성수대교를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이다. 


출처: 뉴스스파크, MONETA뉴스
2. 붕괴의 책임

성수대교 붕괴 후, 책임 논란이 일었다. 서울시는 동아건설의 부실시공이 붕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반면 동아건설은 붕괴의 원인을 서울시의 관리 소홀로 보았다. 서울시가 성수대교의 설계하중을 한참 넘는 차량들을 그냥 통행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시와 동아건설은 다리 붕괴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출처: KBS

언론과 시민들은 붕괴 사고의 원인을 서울시와 동아건설 둘 모두에게 있다 보았다. 서울시가 제대로 안전 관리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안 그래도 동아건설이 부실하게 건설한 성수대교의 수명이 급 단축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고 전날 밤부터 붕괴의 조짐이 있어 시민들의 제보가 있었지만 서울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붕괴된 부분을 조사한 결과 처음부터 볼트가 손으로도 뺄 수 있을 만큼 헐겁게 설치되었거나, 볼트 구멍이 균일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3. 동아그룹의 위기

성수대교 붕괴로 동아그룹과 최원석 회장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진 상황에서 국가적 악재가 겹쳤다. IMF가 터진 것이다. 당시 동아그룹은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에게 이주보상금을 지불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자, 동아그룹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당시 소유한 김포매립지에 외국자본을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출처: 월간조선

마이클 잭슨이 투자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등 계획은 순조로운 듯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토지의 용도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지에서 대지로 토지의 용도를 변경하면 일반적으로 땅값이 크게 상승한다. 이를 염려한 김대중 정부는 농민을 위한 땅이며, 토지변경의 특혜를 동아그룹에게만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용도변경을 거절했다. 그렇게 계획은 계획으로 끝이 났다.


출처: MBC
4. 부실기업의 낙인

최원석 회장은 1998년 경영실패의 책임을 물고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동아그룹은 IMF 외환위기 기업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최원석 회장의 사퇴 이후 회사를 맡은 전문 경영인과 채권단은 동아그룹의 핵심인 동아건설을 살리기 위해 계열사를 전부 매각했다. 그러나 결국 동아건설마저 파산선고를 받으며 동아그룹의 끝을 고했다.


출처: 일요신문, 중앙일보
5. 그룹의 몰락 이후

성수대교 붕괴 사건 이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 최원석의 인생은 이후로도 순탄치 않았다. 새로운 동아건설의 경영진들에게 소송당하는 등 검찰과 법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다 2009년 최원석 회장은 동아그룹이 부채보다 자산이 많은 기업이었으며, 유동성 위기 당시 서울은행장에게 경영권과 전 재산을 내놓아야 동아그룹이 산다는 말을 들었다는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되었다.


출처: 머니투데이, MBN

그는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을 겪었다. 한때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화려한 인생을 살던 그의 인생 절정기는 성수대교의 붕괴와 함께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 성수대교가 새로 지어지고, 동아건설도 새로운 경영진과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의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은 그때의 아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이후 세워진 성수대교 위령비는 찾기도, 가기도 어려운 곳에 설치되었다. 시간이 흘러 동아그룹의 최원석 회장과 성수대교 붕괴 피해자들 모두 세상에서 잊힌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안전불감증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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