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결단의 승부사'라고 평가하는 이유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쌀가게부터 시작해 건설산업, 조선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키며 국내 굴지의 기업 ‘현대’를 구축해냈다. 많은 경영인들의 롤모델로 불리는 그에게는 그 못지않은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현대 가의 후계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가며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라왔다. 그런 그를 일컬어 ‘결단의 승부사’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불리게 된 이유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현대그룹의 왕회장, 정주영 회장의 슬하에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주영은 5남인 정몽헌을 후계자로 점찍어둔 상태였다. 80년대 후반부터 가족들에게 앞으로 현대 그룹은 정몽헌이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우직한 성격 탓에 아버지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큰 정몽구이다. 또한 공부보다는 운동에 재능이 많아 이 점 또한 정주영 회장이 애초에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몽구는 고교시절에 럭비에 빠져 1년 유급까지 하면서 완전히 정주영 회장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럭비는 정주영 회장의 눈 밖에 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럭비부 주장으로 활동하며 배웠던 협동심과 리더십이 훗 날 그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현대에 입사한 정몽구는 24시간 현장을 지키며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고 한다. 이때 부품과 자동차 정비에 대해 배우면서 품질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는 정몽구 회장이다. 그리고 자동차 서비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정몽구에게 정주영 회장은 1977년 현대정공을 설립하여 맡겼다. 정몽구 회장에게 주어진 최초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현대정공을 통해 전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40%를 차지하자 정주영 회장도 정몽구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소를 만들기도 전에 해외 수주를 먼저 따낸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정몽구 회장 역시 아버지 정주영의 방식을 차용해 컨테이너 공장을 만들기도 전에 해외 수주를 먼저 성사시켰다고 한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났던 아들에서 기업 총수로 우뚝 선 정몽구 회장이다. 하지만 취임식 인사에서 세련되지 못한 언변을 선보여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에 의문을 사게 되었다. 일부 직원들은 그의 경영능력에까지 의문을 제기해 회사를 퇴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가 된 현대자동차이다. 이후, 품질경영을 내세우며 부품 하나하나 모든 것을 점검했던 정몽구 회장이다. 그 덕분에 아반떼, 소나타, 그랜저까지 연이은 히트 상품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게 현대자동차는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해외에서도 자동차 업계 최고 강자로 인정받으면서 한때 조롱당하던 치욕을 씻어내려 갔다.
정주영은 수많은 아들 중, 머리가 비상하게 똑똑했던 정몽헌과 정몽준을 특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정주영 회장은 90년대 후반까지도 5남인 정몽헌과 장남인 정몽구 중에 누구를 후계자로 앉힐지 고민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까지 그 후계 구도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자,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현대그룹 형제들 간의 경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병환이 깊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 경영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맞붙었던 것이다.
당시 두 형제의 불안한 '공동 회장제'로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측근을 좌천시키는 보복성 인사를 단행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승자는 정몽헌 회장이었다. 현대그룹 사장단들의 모임인 현대 '경영자 협의회'에서 정몽헌 공동회장을 단독 회장으로 승인되었다.
이때, 정몽구 회장은 분가의 길을 선택했다. 정몽헌 회장은 현대아산,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건설 등 건설·상선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만을 챙겨서 독립해 나왔다. 이로써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보란 듯이 성장해 보이겠다”라는 절치부심의 마음을 먹게 된 정몽구 회장이다.
예정된 후계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추진력을 빼닮아 ‘불도저’로 불렸던 정몽구는 이후, 엄청난 추진력과 결단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한다. 이러한 정몽구 회장의 능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따른 시간 내에 ‘글로벌 자동차 강국’으로 빠르게 일어섰다.
“현장에서 살고 현장에서 쓰러져라”라는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이어받은 정몽구 역시 “책상머리엔 답이 없다. 항상 현장에 가면 답이 있다”라고 말하며 항상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그렇게 국내 재계 순위 2위, 세계 자동차 업계 빅 5의 수장으로 우뚝 선 정몽구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