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결단의 승부사'라고 평가하는 이유

조회수 2019. 3. 15. 10: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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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요신문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쌀가게부터 시작해 건설산업, 조선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키며 국내 굴지의 기업 ‘현대’를 구축해냈다. 많은 경영인들의 롤모델로 불리는 그에게는 그 못지않은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현대 가의 후계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가며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라왔다. 그런 그를 일컬어 ‘결단의 승부사’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불리게 된 이유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출처: 동아화보

현대그룹의 왕회장, 정주영 회장의 슬하에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주영은 5남인 정몽헌을 후계자로 점찍어둔 상태였다. 80년대 후반부터 가족들에게 앞으로 현대 그룹은 정몽헌이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다고 한다.

출처: 주간현대

유년시절부터 우직한 성격 탓에 아버지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큰 정몽구이다. 또한 공부보다는 운동에 재능이 많아 이 점 또한 정주영 회장이 애초에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몽구는 고교시절에 럭비에 빠져 1년 유급까지 하면서 완전히 정주영 회장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럭비는 정주영 회장의 눈 밖에 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럭비부 주장으로 활동하며 배웠던 협동심과 리더십이 훗 날 그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주간현대

처음 현대에 입사한 정몽구는 24시간 현장을 지키며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고 한다. 이때 부품과 자동차 정비에 대해 배우면서 품질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는 정몽구 회장이다. 그리고 자동차 서비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정몽구에게 정주영 회장은 1977년 현대정공을 설립하여 맡겼다. 정몽구 회장에게 주어진 최초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현대정공을 통해 전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40%를 차지하자 정주영 회장도 정몽구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소를 만들기도 전에 해외 수주를 먼저 따낸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정몽구 회장 역시 아버지 정주영의 방식을 차용해 컨테이너 공장을 만들기도 전에 해외 수주를 먼저 성사시켰다고 한다. 

자동차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정몽구 회장이다. 자동차 서비스 사업을 할 때부터 자동차 제작에 관심이 많았지만 삼촌이 현대자동차를 맡고 있는 이상, 승용차를 생산할 수는 없었던 정몽구는 현대자동차에 없는 차종인 4륜 구동 SUV를 생산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몽구 회장은 일본의 미쓰비시 자동차와 협력하여 갤로퍼를 제작해냈다.
1991년, 현대정공에서 갤러퍼를 출시하자마자 두 달 만에 330억 원에 해당하는 수익을 올리며 그 해, 빅 히트 상품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3년 연속 판매 1위 상품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쌍용의 코란도 판매량을 추월하며 갤로퍼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갤로퍼 신화를 이뤄내고 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정몽구는 현대차 화장 자리를 맡게 된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났던 아들에서 기업 총수로 우뚝 선 정몽구 회장이다. 하지만 취임식 인사에서 세련되지 못한 언변을 선보여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에 의문을 사게 되었다. 일부 직원들은 그의 경영능력에까지 의문을 제기해 회사를 퇴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IMF가 터지면서 기아 자동차의 18개 계열사가 부도 방지 대상에 올랐다. 결국 부도를 맞이한 기아차는 국내 재벌들의 인수 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결국 삼성과 현대로 좁혀진 기아차 인수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현대였다. 1997년, 재계 7위였던 기아차를 인수하며 현대 자동차는 200만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자동차 생산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출처: 미래경제

그야말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가 된 현대자동차이다. 이후, 품질경영을 내세우며 부품 하나하나 모든 것을 점검했던 정몽구 회장이다. 그 덕분에 아반떼, 소나타, 그랜저까지 연이은 히트 상품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게 현대자동차는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해외에서도 자동차 업계 최고 강자로 인정받으면서 한때 조롱당하던 치욕을 씻어내려 갔다. 

출처: 조선일보

정주영은 수많은 아들 중, 머리가 비상하게 똑똑했던 정몽헌과 정몽준을 특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정주영 회장은 90년대 후반까지도 5남인 정몽헌과 장남인 정몽구 중에 누구를 후계자로 앉힐지 고민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까지 그 후계 구도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자,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현대그룹 형제들 간의 경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병환이 깊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 경영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맞붙었던 것이다. 

출처: 뉴데일리

당시 두 형제의 불안한 '공동 회장제'로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측근을 좌천시키는 보복성 인사를 단행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승자는 정몽헌 회장이었다. 현대그룹 사장단들의 모임인 현대 '경영자 협의회'에서 정몽헌 공동회장을 단독 회장으로 승인되었다.  

 

이때, 정몽구 회장은 분가의 길을 선택했다. 정몽헌 회장은 현대아산,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건설 등 건설·상선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만을 챙겨서 독립해 나왔다. 이로써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보란 듯이 성장해 보이겠다”라는 절치부심의 마음을 먹게 된 정몽구 회장이다.

출처: kbs 뉴스

예정된 후계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추진력을 빼닮아 ‘불도저’로 불렸던 정몽구는 이후, 엄청난 추진력과 결단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한다. 이러한 정몽구 회장의 능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따른 시간 내에 ‘글로벌 자동차 강국’으로 빠르게 일어섰다.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 제철 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2004년, 현대차 그룹에서 한보 철강 당진 제철소를 인수 한 것이다. 제철소 건립을 위해 10조 원에 가까운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정몽구의 결단력 덕분에 현대 자동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자동차 생산에 가장 필요한 제철소까지 얻으면서 현대자동차는 독보적인 그룹이 될 수 있었다.
“이 땅을 놓치면 기회 없다”라는 생각으로 정몽구 회장은 한전 부지에 10조 원을 과감하게 배팅했다. 이로써 삼성과의 입찰경쟁에서 다시 한 번 승기를 잡은 현대자동차이다. 정몽구 회장은 한전 부지를 활용하여 그룹 내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만들 생각이라고 한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품사와 계열사를 한곳으로 모아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이다.
출처: 매일경제

“현장에서 살고 현장에서 쓰러져라”라는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이어받은 정몽구 역시 “책상머리엔 답이 없다. 항상 현장에 가면 답이 있다”라고 말하며 항상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그렇게 국내 재계 순위 2위, 세계 자동차 업계 빅 5의 수장으로 우뚝 선 정몽구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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