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진압 사과하러 왔다'던 일제가 저지른 만행

조회수 2021. 2. 16. 13: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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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사격이 끝난 뒤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이 일제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다. 이른바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일제는 제암리 주민들을 모아 예배당으로 들여보낸 뒤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스물 아홉.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 가운데는 이웃 마을 주민 여섯도 있었다.


제암리(提巖里,속칭 ‘두렁바위’)는 당시 전체 33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제암교회는 이 마을의 안종후라는 청년이 한학을 배우려고 서울을 왕래하다가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하고 1905년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당시 제암교회 지도자였던 안종후, 홍원식(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출신)은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웃마을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인 김성렬과 함께 ‘구국동지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할 정도였다. 이러한 지도자의 헌신에 힘입어 제암교회는 부녀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신앙교육과 더불어 민족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그 때,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이 당시 수원군이었던 향남면 제암리까지 내려왔다. 제암리의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주도하여 시작되었다.


3월 31일은 발안의 5일장이었다. 만세 운동은 정오께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은 위협사격을 시작했고 군중은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군 수비대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제암리 기독교인 홍원식·안종후 등과 고주리 천도교인 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때 흥분한 시위대는 일본인 가옥과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사카(佐板) 등 43명이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사사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에 일본군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제암리 교회 등 제암리 유적은 국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 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4월 2일부터 일제는 제1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었으며 이 작전은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을 주축으로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가와바타(川端) 순사를 처단하였다.


4월 5일 새벽에는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였다. 이들은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렀다. 이 불로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는 등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수촌리 학살 사건이다.


4월 9일부터 16일까지 제2차 검거 작전이 벌어졌다. 4월 13일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들어왔다.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지만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과 달리 제암리 주모자들이 체포되지 않고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 토벌 계획을 세운다.


4월 15일 오후 2시께,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들어갔다. 아리타는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만세운동을 강경 진압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면서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예배당에 모이게 했다.


모인 사람들과 기독교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던 아리타는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일제히 창문을 통해 사격을 개시했고 이내 예배당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사격이 끝난 뒤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이 동네로 번져가자, 군인들은 불길이 번지지 않은 마을에도 불을 질렀다. 예배당에서 탈출하려던 사람 몇이 사살되었고, 불을 보고 달려왔던 마을사람도 총을 맞고 죽었다. 그렇게 하여 제암리 교회에서 모두 스물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 주모자의 한 사람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여섯 명도 학살했다.


스코필드(1889~ 1970)

이틀 후인 4월 17일, 세브란스의전 교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이름 석호필, 1889~ 1970) 선교사는 4월 5일에 자행된 수촌리 학살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러 가다가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이튿날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했고 이후 여러 차례 현장을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책을 펴내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그를 ‘3·1운동의 제34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 학살의 참상을 보도한 그의 활동을 기려서다.


이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해서 일본 학자들은 ‘일부 군인들의 우발적 사건’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미리 명단을 파악하여 주민들을 모았고 이웃마을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사실을 감안해 보면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제암리 교회 뒷동산의 합장묘. 희생자 23명의 유해를 안치했다.

이 사건을 은폐하고자 한 정황은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가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라고 적은 일기가 발견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났다.


3·1운동은 온 민족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한 거족적이고 거국적인 독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발발일로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오랜 관습 때문에 이 전 민족적인 저항을 단 하루 동안의 운동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3·1운동의 전모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3·1운동과 일제의 폭력진압


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전국에서 이루어진 집회는 모두 1,542회, 참가인원은 202만 3,089명에 이른다. 비폭력운동이었지만 일제의 진압과정에서 희생도 컸다.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5,961명, 검거된 사람은 5만2,770명에 이르렀다. 또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실되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등 제암리 학살과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희생이 발생한 사건도 12건에 이른다. 학살의 피해는 시위를 주도한 소수의 사람들 뿐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무명의 군중들에게도 미쳤다.


1982년 9월 정부는 제암리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현재 제암리 유적에는 제암리 교회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을 비롯하여, 삼일 운동 순국탑, 기념관, 합장묘 등이 있다.


해방 7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 역사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사를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전체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사에 대한 이해는 현재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을 증대시킨다’고 할 때 식민지 시기의 영욕의 역사는 우리의 현재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 교과서조차 국정화하는 이 엄청난 퇴행의 시대, 역사가 선 자리는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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