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절히 원했던 '마켓컬리'를 퇴사한 이유

조회수 2020. 12. 17. 08: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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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철학은 진실함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나는 오늘(12월 8일) 입사 한 달 만에 마켓컬리를 퇴사했다. 정식 입사 전부터 1년 6개월간 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업무 부적응은 아니다. 입사가 간절했던 회사를 퇴사한 이유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때 나에게 멋진 철학이 있던 회사



▲마켓컬리 홈페이지
“컬리는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켓컬리는 이런 멋있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는 회사다. 나는 이 철학을 사랑했다. 한때 이 철학은 진실했다. 과거에 컬리는 보냉력 문제로 포장 박스를 스티로폼을 많이 썼다. 잘 썩지 않는. 그래서 인터넷에서 환경파괴의 주범이라고 비판을 많이 받았다.


슬아님은 이 문제를 대충 넘기지 않았다(컬리에서는 CEO도 ‘이름+님’으로 부른다).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직배송(원거리 택배 제외) 포장 박스를 전량 보냉력이 좋은 종이 재질로 바꿨다. 경영만이 아니라 물류센터 운영상으로도 과감한 의사결정이었다.


우선 물류센터에는 상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다음으로 고객에게 주문이 들어온다. 주문을 일일이 한 건씩 처리하면 엄청나게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주문을 200건 단위로 묶는다. 이 200건에 해당하는 상품 목록, 위치, 수량이 담긴 작업 지시서를 보면서 상품을 한 번에 창고에서 꺼낸다. 그리고 ‘다스(DAS, Digital Assorting System)’라는 곳으로 보낸다.


아래 사진이 다스다.

출처: Byline network 엄지용 기자
▲“[스튜디오 바이라인] 마켓컬리 물류 시스템 한눈에 보기”

이 다스라는 곳에는 고객별 송장이 한 장씩 담긴 200개의 바구니가 선반에 놓여있다. 상품의 바코드를 스캐너로 찍으면 어느 바구니에 몇 개를 넣어야 하는지 LED 불빛이 알려준다. 200건을 다시 한 건씩 쪼개 상품을 분류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바구니에서 포장 박스로 상품을 옮겨 담고 송장을 붙여 배송 준비를 마무리한다.


여기서 박스 재질은 변수다. 종이 박스 도입 전 컬리 물류센터 일부는 효율을 위해 아예 플라스틱 바구니 대신 스티로폼 박스를 다스에 집어넣었다. 크기가 다스 사이즈에 딱 맞았다. 박스 갈이(바구니→박스) 작업을 건너뛰자 포장 효율이 좋았다. 컬리가 포기한 것은 바로 이 효율이다.


고객이 과대포장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종이 박스를 도입하면서 크기도 세분화했기에 더 이상 바구니 대신 박스를 다스에 넣을 수 없었다. 당연히 포장도 까다로워졌다. 현장 반응은 차가웠다. 현장 관리자부터 알바생까지 “이거 대체 왜 해요?”, “얼마나 가나 보자.”고 했다. 현장의 최대 관심사는 당장 그날 그날의 생산 마감 시간인 ‘새벽 1시’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이 힘들고 바쁜 일을, 그것도 이 시국에 물류 최전선에서 헌신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한 번쯤 멈춰 서서 나침반을 봐야 할 때가 있다.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데 계속 실패할 때, 회사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라는 고민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 고민을 떠안은 장막 뒤에 누군가가 종이 박스를 계속 물류센터로 보냈다.


바뀐 출고 과정에 맞게 주문처리 가능 건수와 필요 인력이 다시 예측됐다. 디테일 한 부분은 차츰 맞춰 나갔다. 결과적으로 마감 시간을 맞추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제서야 현장은 마치 처음부터 종이 박스를 써 온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움직였다. 이 일을 겪은 뒤, 나는 “이 회사는 경영철학만은 확실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악역을 맡아야 했다

꿈에 그리던 입사를 했고, 본질적인 질문부터 출발했다. 우리는 왜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가?


이 업계는 속도가 빨라진 만큼 배송 기사와 물류센터 인력의 근무강도 및 시장의 출혈경쟁 과열에 관한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그냥 빨리빨리가 최고라서’와 같은 감수성 없는 답변을 한다면 고객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호소력 있는 답변은 ‘식자재를 누구나 집에 있는 시간대(아침)까지 신선한 상태로 전달해야 하니까’이다.


재활용률이 90%인 종이로 포장 박스를 바꾼 것도 고객의 도덕적 감수성을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다. 그 때문에 나는 마켓컬리가 완벽히 ‘착한 기업’은 아니어도 방향성만은 그쪽으로 가려고 노력하는 회사라 생각했다. 남은 과제는 ‘오출고’ 실태를 조사하고 개선안을 도출하는 일이었다.



오출고란 출고 과정의 오류로 주문 내역과 다르게 배송되는 것이다. 아보카도 2개를 주문했는데 엉뚱한 자몽이 2개 오거나 아보카도 하나가 덜 오면 황당하지 않을까? 혹은 아이의 생일 케익이 찌그러져 왔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다시는 마켓컬리를 이용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배속된 현장 팀원들이 다스와 포장을 통과한 바구니와 포장 박스를 개봉해 오출고 여부를 조사하면, 나는 이를 데이터화했다. 데이터가 쌓여 확인된 오출율 수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물량 증감에 유연하게 대처 가능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써온 다스(DAS)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


위 영상에서 볼 수 있듯, 다스에서 200개의 바구니에 상품을 분배하는 주체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사람은 실수를 한다. 영상 속 기자는 설명을 위해 천천히 상품을 분배하지만, 물량이 많아 바쁘면 어떨까? 2배, 4배, 8배, … 현장은 빠르게 움직이고 실수를 할 확률도 올라간다. 상품을 넣는 과정에서 원래 바구니가 아닌 옆 바구니에 엇갈려 넣거나, 서두르다 파손을 시킨다.


이런 것을 조사해야 했던 나의 일은 현장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고 의욕을 꺾는 일일 수 있다. 오출 검수팀의 존재 자체가 열심히 일하는 현장 한가운데서 “당신들이 일하는 방식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어요.”라는 시그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나는 악역을 맡은 것이다.




출고 현장을 ‘정글’로 만드는 사람들


나는 데이터만 만진 것이 아니라, 인수인계받은 대로 적발 사진을 기계적으로 사내 메신저에 공유하는 일도 했다. 내용은 어느 장소에서 오출이 발견됐다는 건조한 팩트 위주였다. 팩트에는 논란이 될 게 없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 자꾸 압력이 들어왔다.


매뉴얼 상 오출이 맞는데 그냥 넘어가 달라고 요구하거나, 확인해보면 자신들의 공정에서 생긴 문제도 있는데 무조건 선공정 탓으로 우기면서 내 앞에서 바구니를 발로 차는 행동을 하거나, 약자(신규 알바)의 미숙함으로 돌리며 진지한 대화를 피했다. 주문 바구니를 완성하지 못한 채 후공정으로 자주 넘겨버리는 어떤 관리자는 사적인 감정 없이 최대한 상품을 찾아봤는지 사실 확인만 했을 뿐인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계단에서 어깨를 부딪히고 가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 것도 실수자에 대한 문책이나 당장의 개선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문제의 직시와 개선 의지가 담긴 합리적 대화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존심 문제이고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그들에게 마켓컬리 물류센터는 정글이었고 나는 정글에서 살 수 없었다.




속도는 승부처가 아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일부 현장 관리자들로부터 겪은 좌절을 마켓컬리라는 회사 전체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이 회사는 좋은 철학을 갖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는 사람들도 일하는 곳이다. 내 업무 영역에서 자주 마주쳐야 했던 일부 관리자가 안 좋은 모습을 보였을 뿐, 대부분의 현장 직원들과 일용직 사원들은 오늘도 헌신적으로 마켓컬리를 움직인다.


재고관리팀이나 고객관리팀, 머천다이징팀, CEO인 김슬아님 등이 사내 메신저에서 대화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무언가 항상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매일 구매자의 실망을 없애겠다”는 마켓컬리의 지향점은 내부 분위기와 일치한다. 다만, 냉정히 평가하면 마켓컬리는 이 좋은 경영철학과 의지가 물류센터 운영 단계로 잘 이어지지 않는 회사이다.


이유는 현장이 무척 바빠서 개선안에 방어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포장 박스를 종이 재질로 바꿨을 때 처음 보인 반응처럼 말이다. 출고 현장을 정글로 만든 사람들도 어쩌기 힘든 상황에 종속돼 자부심 하나로 버텨왔기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개개인을 설득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는 말에 회의적이다. 해결은 시스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물류 용어로 물류 처리 가능량을 일컫는 캐파(CAPA)라는 게 있다. 마켓컬리가 오출을 줄여 고객 서비스 품질을 향상시키려면 자신들의 캐파가 과대평가된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보다 솔직히 말하면, 고객에게 오류 없이 배송할 능력이 아직 부족한데도 너무 많은 물량을 소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오출을 줄일 방법은 많다. 쿠팡처럼 ‘출고 검증’ 과정을 도입하거나, 서로 엇갈려 오출이 많이 발생하는 유사 상품끼리 떨어뜨려 창고에 적치하기 위해 데이터분석 기법을 도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도입하면 얻을 것도 있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잃을 것도 있을 것이다. 종이 박스를 도입했을 때 컬리가 효율을 포기한 것처럼 말이다.


김슬아님은 “유통의 미래는 ‘좋은 상품에 대한 집착’에 달렸습니다. 속도는 승부처가 아닙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현장은 속도가 최대 관심사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BY 하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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