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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가장 끔찍한 가정, 나치가 원자탄을 개발했다면?

조회수 2020. 12. 8. 13: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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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원자탄 없이도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다.
오토 한

‘만약 그랬다면?’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이런 가정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끔찍한 가정이 가능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은 '2차대전 나치 독일이 원자탄을 만들었다면'이라는 가정이 아닐까.


실제로 1945년 봄, 미국의 원자탄 개발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나치 역시 남부 독일의 한 동굴에서 원자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관련 과학자들이 원자탄 제작방법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과학자들이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독일은 방사능 물질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원자력 개발은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동등성 이론 (E=mc², 에너지 = 질량 * 광속의 제곱)에서 출발했는데, 광속이 초당 299,338km를 넘게 되면 에너지 값은 폭증하게 된다. 20세기 초, 물리학은 작은 물질단위에서 핵을 분열시키면 엄청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행히도 모든 물질의 핵은 상당히 안정적이며 핵 연쇄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데 1930년대 중반 미국은 우라늄 실험에서 핵 에너지를 이용한 핵무기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 장면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와 함께 최고의 과학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독일도 핵무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38년에 원자를 나눈 최초의 과학자도 오토 한(Otto Hahn)이었다. 한은 함참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실험을 했는 지를 깨닫게 된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한의 발견의 의미를 깨닫고 프로세스를 정리해 설명했다. 마이트너는 한이 중성자로 작은 우라늄 샘플을 두들겨서 말 그대로 우라늄 원자를 나눠서 강력한 원자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았다.


황당하게도 나치정책은 유대인 교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리제 마이트너는 베를린 근처의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서 쫓겨나 스웨덴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이트너는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한의 처사와 나치의 반 유대인정책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한을 계속 돕는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 마이트너는 원격지에서 한 동안 나치 독일의 과학자를 지원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 과학자는 그렇게 운이 좋지도 않았고 순진하지도 않았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모든 유대인 과학자는 나치에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국이나 미국으로 떠났다. 그 중에는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나치를 지지하는 학계인사는 유대인, 외국인, 반 나치 독일인이 떠나고 남은 자리를 탐욕스럽게 차지했다. 이들은 주변에 머물던 교사나 과학자였고 이론 물리학자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혐오했다. 나치 치하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관련 이론은 유대 물리학으로 취급했고 고전인 실험물리학만을 인정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치정부는 핵무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30년대 말, 아인슈타인이 독일을 떠나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vner Heisenberg)가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와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뛰어난 이론가, 수학자 그리고 물리학자로 독일에서 가장 젊은 교수이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

1932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37년, 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물리학과장이 되었다. 그는 열렬한 나치당원은 아니었어도 애국심은 대단했고 히틀러에게도 기꺼이 협조할 생각이 있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이 원자를 나누기 몇 개월 전인 1937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SS잡지 Das Schwarze Korps 기사에서 공격을 받았다. 요하네스 스타르크(Johannes Stark)라는 반 유대 실험주의학자가 하이젠베르크와 유대인 동료의 성공에 분노하며 그를 공격했다. 그는 하이젠베르크를 참 독일인을 요직에서 배제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찬양하는 친 유대주의자이며 나치당에 반대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웃어넘길 수 없었으며 집단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더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당의 도움을 받아 혐의를 벗으려고 했다. 하인히리 히믈러(Heinrich Himmler)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어머니는 총통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치 친위대의 심문이 있었고 히믈러가 직접 심문하며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히믈러는 하이젠베르크의 혐의를 벗기며 연구를 계속해도 좋지만 유대 과학자의 도움없이 상대성 이론과 유대 과학자의 이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석방된 하이젠베르크는 최선을 다해 핵무기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독일은 연합국에 몇 년 앞서 국가주도의 핵연구를 시작했고 비밀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연합국은 독일에서 탈출한 수 많은 물리학자에게서 독일이 벌이고 있는 엄청난 프로젝트에 대해 어렴풋이 파악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프랭클린 루즈벨트(Frakiln Roosvelt)에게 독일 프로젝트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핵무기 개발이 힘을 얻었다.

1941년, 독일은 2개의 원자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하이젠베르크 팀의 결정은 독일의 핵무기 프로젝트를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원자로는 내부에서 우라늄 238 물질의 연쇄반응을 유도해서 가동하는데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방사성 동위원소(Radioactive Isotope)를 둘러싼 중성자 흐름을 흑연이나 중수소(중수Heavy Water)로 조절해야 한다. 독일은 자연에서 모으거나 제조하기 힘든 중수를 선택했다.


1940년, 독일은 노르웨이 오슬로 북부 160km 지점에 있는 베르모크(Vermok)의 중수공장(사진 참조)을 점령했다. 영국정보부는 독일의 원자로 계획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노르웨이 중수공장을 노렸다. 1942년 중반, 이 공장에서는 매년 4,500kg의 중수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수부대의 공격은 글라이더가 엉뚱한 지점에 착륙하면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영국이 아닌 노르웨이 특수부대가 공장에 침투해서 중수 저장고를 폭파했다.

노르웨이의 나치 중수저장고

영국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독일 과학자들은 1941년에 미국의 핵무기 제작과정과 비슷한 여러 가지 결론을 내렸다.


1. 농축 우라늄 분열 무기


2. 플루토늄 분열 무기


3. 원자로 폭탄


그러나 미국은 종전 직전에 원자로, 우라늄과 플루토늄 폭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반면에 독일은 원자탄 생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미국 원자탄은 우라늄 분열 무기였다. 고도로 농축된 우라늄 235를 충분히 생산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우라늄 238에서 극소량만이 생산되는 중위원소였다. U-235는 단시간 내에 화학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기체확산(Gaseous Diffusion)과정을 거쳐야 한다.


독일의 인종차별 정책이 여기에서도 발목을 잡았다. 구스타프 헤르츠(Gustav Hertz)가 기체확산 연구에서 상당히 앞서 있었지만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인척이었던 하인리히 헤르츠가 유대인이어서 베를린 기술대학 물리학과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후임은 그의 연구를 계속할 의지나 능력이 없었고 독일은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방법을 결국 찾지 못했다.


독일과 미국은 원자탄에 얼마나 많은 U-235가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라늄 분리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하이젠베르크와 독일은 U-235 분열 무기의 실용가능성에 대해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 그들은 미국에 비해 너무 많은 양을 예측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쇄반응에 필요한 U-235 양을 개략적으로 계산했고 약 1톤이 있어야 원자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45kg만 있어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반면에 독일은 1톤이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양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 독일이 맨하탄 프로젝트(Manhatton Project)와 같이 총력전을 기울였다면 오차가 훨씬 줄어 들었겠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결정을 이끌 위치가 아니었고,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의 판단이 필요했다. 그는 종전 전까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지에 대해서만 궁금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2년의 육군과 무장친위대 고위장교들과의 회의에서 슈페어와 만났다. 슈페어와의 비밀회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슈페어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는 핵무기나 원자로에 대해 훨씬 많은 인력과 예산 투입을 요구하지 않았다.


슈페어는 독일 핵무기 과학자들이 큰 도움이 안 되며 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수 있는 로켓이나 제트엔진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독일 과학자들도 처음부터 우라늄의 양을 잘못 예측했기 때문에 미국이 맨하탄 프로젝트에 온 힘을 기울인 것처럼 독일의 총력지원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이젠베르크가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독일 과학자들은 원자로 가동연구를 계속했고 원자로를 방사능 폭탄(Dirty Bomb)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로를 최대한 가동시킨 후에 재래식 폭약으로 터트려 대대적인 방사능 오염을 시킨다는 개념이었는데 1톤의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탄만큼이나 실현가능성이 없는 계획이었다. 방사능 오염을 시키려면 목표지까지 원자로를 실어 날라야 했다.


독일은 원자로에서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해서 핵무기 분열물질로 사용하는 방법도 고려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 폭탄과 같은 것인데, 고 방사성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U-238을 연소해서 얻는 부산물이었다. 양만 충분하다면 오히려 플루토늄이 더 나을 수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과학자들이 슈페어와 고위관료에게 이 가능성을 설명했다.


독일의 원자로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학구적인 목적이 강했다. 실험용 원자로를 2개나 만들었는데도 협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연합국보다 훨씬 뒤처졌다. 심지어 하이젠베르크와 과학자들은 점령국의 선전책동에 동원되고 논문집필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정부도 원자탄 프로젝트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이 로스 알라모스와 테네시 공장에 최고의 두뇌를 집결시킨 반면에 독일은 연구시설과 중수공급 정도에 머물렀다.


1945년, 독일 연구팀은 소련의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 남서부 슈바베Swabia 지역의 동굴에 연구 원자로(사진 참조, 두 번째 사진은 모형)를 설치했다. 그렇지만 미군이 접수할 때까지도 연쇄반응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군부대와 함께 온 연합국 과학자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독일의 원자로는 그냥 관광거리에 불과했고 미군은 소련에 앞서 우라늄, 중수와 물리학자를 확보하는 정도에 멈췄다.

독일 슈바베 지역의 동굴 연구원자로
독일 원자로 모형

하이젠베르크는 종전 후에 일부러 원자탄 프로젝트를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따. 자신은 1942년에 U-235 물질량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슈페어에게 엉터리 정보를 주었다고 말했다. 1941년에 있었던 스승 닐스 보르Nils Bohr와의 만남에서 그가 원자탄 프로젝트에 대해 괴로워했다는 것을 보면 그 주장이 실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슈페어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종전 후의 자료를 보면 대부분의 과학자가 만들 수만 있었다면 기꺼이 원자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만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독일은 나치의 반 유대정책으로 귀중한 두뇌를 연합국에게 내주었다. 독일과 점령국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추방되고 밀려나고 처형되었다. 많은 과학자가 영국과 미국에서 나치정권 붕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이젠베르크 팀도 최고의 물리학자였지만 맨하탄 프로젝트에 모은 수 많은 두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지원도 비교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맨해탄 프로젝트를 지휘한 레슬리 그루브스Leslie Groves장군과 같은 리더가 없었고 독일의 원자탄 프로젝트는 이 부서 저 부서를 떠돌며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독일은 미국 프로젝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독일과학이 미국보다 뒤처진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유럽에서 탈출하는 과학자에게서 독일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파악했지만 독일은 그런 정보망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일본 원자탄투하 소식을 들은 독일 과학자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변명하기 급급했다.

원폭 시험장을 보고 있는 레슬리 그루브스 장군(오른쪽)

마지막으로 독일정부는 제트엔진과 로켓에 더 많은 과학자를 동원했다. 그 덕분에 제트엔진과 로켓은 연합국보다 훨씬 앞섰지만 군사측면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귀중한 두뇌와 재원을 낭비하는 꼴이 되었다.


만약 독일이 귀중한 두뇌를 유출하지 않고 수 천 발의 V-1/2 로켓에 들인 노력을 원자탄 프로젝트에 모두 투입했다면 전세계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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