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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저는 한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조회수 2020. 12. 6. 0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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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변호사님, 제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변호사님, 이번 국선변호 건은 좀 무거운데요?”


송무과장이 내가 이번에 맡을 국선변호 건을 보고하러 들어왔다. 보통 국선변호 사건은 단순 폭행이나 절도가 많은데 이번에는 피해액이 제법 큰 경제사범이었다. 변호사들이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인 국선변호지만 이번 건은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부담이 앞섰다.


김성원 씨(가명)의 죄명은 ‘유사수신행위규제법 위반’이었다. 은행에서 고객들로부터 돈을 입금받은 뒤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이자를 붙여주는 것을 수신행위라고 한다. 이런 수신행위는 인가를 받은 금융기관만 취급할 수 있다. 그런데 사설 업체가 정부의 인가 없이 ‘1,000만 원을 맡기면 매주 100만 원씩 열두 번에 걸쳐서 주겠다’는 식으로 높은 이자를 약속하면서 돈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유사수신행위규제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된다.


성원 씨를 비롯한 일당 7명은 경기도 어느 읍 단위 마을 주민 300명을 대상으로 양돈사업에 투자해서 돈을 불려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일인당 적게는 몇백만 원에서 많게는 몇천만 원씩 투자받았다. 이들은 투자자들에게 매주 일정한 이자를 지급하며 신뢰를 쌓다가 어느 날 갑자기 100억 원에 이르는 돈을 챙겨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결국 주범을 제외한 일당 6명은 경찰에 구속되었다.


변호 준비를 위해 처음 구치소에서 만난 성원 씨는 내게 이렇게 변명했다.


“전 그런 일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아는 동네 형이 손님들에게 커피 타 드리고, 나이 드신 분이 오시면 어깨 정도 주물러드리면 된다고 해서 갔을 뿐입니다. 전 수고비 조로 돈을 조금 받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기가 막혔다. 징역 3년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나는 이미 수사기관이 증거를 확보했으니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법원의 선처를 바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성원 씨에게 전했다. 그러자 성원 씨는 하소연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죄를 인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 친 것이 없는데 벌을 받는 건 억울합니다. 변호사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국선변호 사건은 대부분 피고인이 죄를 시인하는 사건이라 변호할 때 큰 어려움이 없는데, 이번 사건은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서 앞으로의 법정 변호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피해액 규모가 워낙 크고 증거도 명백해서 성원 씨가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저는.. 한글을 못 읽습니다


성원 씨를 만나러 성동구치소에 가던 두 번째 날, 나는 유사수신행위를 한 일당들이 피해자들에게 나눠준 투자설명서를 성원 씨에게 내밀었다. 그 투자설명서에는 일정한 금액을 투자하면 상당한 이자를 붙여서 돌려줄 수 있으며 자신들이 진행하는 양돈사업은 전망이 아주 밝다는 내용이 화려한 그래프와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이런 투자설명서를 피해자들에게 나눠준 것이 사실입니까?”


내가 내민 투자설명서를 받아 든 성원 씨는 마치 그 설명서를 거꾸로 뒤집어 한참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성원 씨가 이제야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성원 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뜻밖이었다.


“변호사님, 사실대로 말하면… 전 한글을 못 읽습니다.”


나는 한동안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네? 뭐라고요?”라며 몇 번쯤 되묻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성원 씨는 제대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해서 자기 이름 외에는 거의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없었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성원 씨와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성원 씨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죄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경찰이나 검찰이 주장하는 범죄사실의 핵심은 성원 씨도 다른 일당들과 작당하여 피해자들을 속이려는 고의를 갖고 투자를 권유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한글도 못 읽는 사람이 무슨 사기행각을 벌인다는 말인가? 성원 씨가 내게 했던 변명, 즉 단순히 방문한 사람들에게 커피를 타 주고 어깨를 주물러주었다는 그 진술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제가 성원 씨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성원 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변호사님, 제가 한글을 못 읽는다는 걸 밝히실 건가요? 부탁입니다. 제가 한글을 모른다는 얘기는 재판에서 절대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죄를 입증할 유일한 방법을 거절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성원 씨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이대로 재판이 진행되면 성원 씨는 아마도 징역 3년형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은 무죄를 입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하지만 성원 씨는 단호했다.


“피해자가 모두 우리 마을 사람들입니다. 재판을 할 때는 아마 마을 사람들이 전부 법원에 올 겁니다. 제 아들이 지금 고3입니다. 아들은 저를 닮지 않아서 그런지 공부를 잘합니다. 몇 달 뒤면 수능 시험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아들은 마을에서 놀림거리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험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다시 성원 씨를 설득했다.


“성범죄 재판의 경우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방청객들을 전부 퇴장시킨 다음 재판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번 사건도 재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비공개 재판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원 씨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이 글을 못 읽는다는 것이 밝혀질 우려가 있다면서 제발 자신의 의견에 따라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썼다. 협박을 한 것이다.


“지금 2주일 정도 구속당해보니 어떤가요? 힘들지요? 그런데 일이 잘못되면 자그마치 3년입니다. 앞으로 3년을 이 감옥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요. 아마 아드님도 이해해 줄 겁니다. 설마 아드님이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을 바랄까요?”


성원 씨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변호사님, 힘드시면 저 변호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저 그냥 3년 감방에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성원 씨의 생각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결국 변호의 방향을 수정해 성원 씨의 행위 가담 정도가 약하다는 점을 밝히는 데 최대한 주력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3개월간 치열한 법정공방이 진행되었다.

주범이 도망가버린 상황이라 남아 있는 공범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행위 가담 정도가 다른 사람에 비해 미미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죄를 떠넘기는 꼴사나운 광경이 연출됐다. 이는 성원 씨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원 씨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선배라는 사람도 자신이 빠져나가기 위해 정작 중요한 투자설명은 성원 씨가 했다는 식으로 법정에서 허위진술까지 했다. 그런데도 성원 씨는 화가 나지도 않는지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 선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박할 증거가 마땅히 부족했던 나는 피해자들의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며 실제 투자 권유를 한 것은 다른 사람이고 성원 씨는 별다른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언해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그놈이 뭘 잘했다고 내가 그 사람 편을 들겠소?”라고 반문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억울한 사람이 옥살이를 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거듭 하소연했고 다행히 성원 씨에게 우호적인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었다.


두 명의 증인에게 내가 질문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자설명회에 갔을 때 자료를 나눠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투자설명 자료에 따라 설명을 진행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성원 씨가 한 행동은 무엇인가요?”


“성원 씨가 단 한 번이라도 투자에 대해 설명을 한 적이 있나요?”


일단 증인석에 서게 되면 거짓 증언을 할 경우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기에 증인들은 사실대로 증언을 하게 된다. 다행히 증인들은 성원 씨가 직접 투자설명을 한 사실은 없으며 현장에서 커피를 타거나 잔심부름만 했다는 점을 한결같이 증언해 주었다. 그래도 애가 탔던 나는 증인신문을 하면서 ‘저 사람은 한글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요!’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욕망을 몇 번식이나 씹어 삼켜야 했다.


지루한 법정공방이 끝난 후 드디어 피고인들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성원 씨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징역 1년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성원 씨는 행위 가담 정도가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 일단 석방이 되기 때문에 성원 씨는 약 4개월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신은 위대한 아버지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성원 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성원 씨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에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애 많이 써주셨는데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약소하게나마 식사대접이라도 하려고 왔습니다.”


파란색 수의를 입은 모습만 보다가 멀쩡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성원 씨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깍듯한 태도로 아버지를 대하는 성원 씨 아들의 모습이었다. 식사 중 성원 씨 아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 이번에 아버지의 재판을 보면서 꼭 법대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애쓰시는 변호사님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저도 꼭 어려운 사람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괜스레 콧날이 찡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성원 씨 가족의 뒷모습을 보았다. 징역 3년과 맞바꾸면서 지키려 했던 것이 바로 저 모습이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한다.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도 이럴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아들의 수능시험을 위해 3년간의 감방생활을 감수하겠다는 생각은 분명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성원 씨가 아들의 수능시험만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대가가 징역 3년이라면 우리는 성원 씨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도 성원 씨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아버지였다. 비단 성원 씨뿐이겠는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편안함은 얼마든지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땅의 모든 위대한 아버지들께 힘내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by 조우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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