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빠들이 입는 옷은 하나같이 똑같을까?

조회수 2020. 11. 22. 08: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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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젊은 시절 그 많던 옷은 어디로 갔나..

“아빠 평소처럼 입고 오면 공항에서 아빠 아는 척도 안 할 거야! 맨날 입는 그 하늘색 바람막이 입고 오기만 해봐!”


아빠와 단 둘이 일본 여행을 가기로 하자마자, 나는 출발 한참 전부터 주구장창 아빠에게 당부했다. 제발 평소처럼 입고 나오지 마라, 만약 그랬다간 일본 가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근 한 달간 아빠를 들들 볶았다. 아빠에겐 당장 ‘제대로 된 외출복’을 구해야 한다는 미션이 떨어진 것이다. 평생 ‘코디’ 한 번 제대로 갖춰 본 적 없는 아빠에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문제 때문에 엄마가 근처 백화점과 아울렛 매장을 모두 뒤졌다고 했다. 엄마에게 의도치 않은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속으론 ‘정말 남성 의류매장이 그렇게 없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남성복 매장은 있다. 실제로 나도 가봤으니까. 그리고 깨달았다. 단지, 아빠들을 위한 ‘가벼운 외출복’ 자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아빠 젊은 시절, 그 많던 옷은 어디로 갔나...


‘아빠가 입는 옷’을 떠올리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생각해낼 수 있다. 어두운 색 양복 자켓, 셔츠, 정장바지다. 계절에 따라 셔츠가 반팔이 되기도 하고, 이 위에 코트가 올라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늘 이러했다. 집에선 기능성 티셔츠를 입거나, 날이 좀 쌀쌀해지면 그놈의 하늘색 등산용 바람막이를 위에 걸친다.


결국, 정장과 티셔츠, 그리고 몇 개의 등산복을 제외하면 우리 아버지의 외출복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실, 등산복을 입으시더라도 내가 하도 싫은 티를 팍팍 내니까, 아예 외출복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내 옷장 전체를 다 쓰고도 모자라 외부 행거까지 사용하는데 말이다.

아빠의 옷들은 옷장 한쪽에 얌전히 소박하게 걸려 있곤 했다.

‘입을 옷이 없다’는 문제는 간절기에 더욱 간절해진다. 셔츠를 한 장만 걸치기엔 춥고, 그렇다고 그 위에 또 코트를 입기엔 덥기 때문이다. 이건 흔히 말하는 “있는 옷을 다 꺼냈는데 이 많은 옷 중에 입을 게 없다” 같은 얘기가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입을-옷이-없음이다. 여성의류는 오히려 봄가을 패션이 훨씬 다양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아버지가 유독 옷을 안 입는 걸까?’ 싶었는데, 정작 알아보니 주위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들 또한 비슷비슷한 옷장 사정을 갖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우리 아빠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나이대 아버지들이 당면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터나 집이 아닌 제3의 다른 공간에서는 갖춰 입을 옷이 당장 없어지는 일이.


RT) 사실 한국 남성 특히 중장년 가부장의 복식 문맹은 재앙 수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년 내에 이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일단 회사와 집만 반복적으로 다니다 보니, 따로 신경 써서 옷을 입을 필요를 느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또 중장년 남성들이 즐길 만한 여가란 골프나 등산 정도―이마저도 사회 생활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이다 보니 자신만의 ‘패션’을 계발하는 취미를 붙이기 어렵기도 하다. 내가 어떤 옷을 좋아하고, 내 개성과 스타일이 어떤지 돌아볼 만한 삶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상되는 모든 경우에 대응할 최소한의 무난한 ‘복장’들을 비상용 세트처럼 갖춰 놓고 돌려 입고 있다. 우리 아버지가 꼭 그렇다. 어디에서나 ‘먹히는’ 무난한 단벌 정장에, 한겨울에는 두꺼운 코트 한 벌, 한여름에는 얇은 반팔 한 벌 그리고 “밖에 나갈 때” 입는 등산의류 한 벌. 내가 그토록 지겨워하는 ‘하늘색 바람막이’는 등산의류에 해당하는 셈이고, 이러니 해외여행처럼 ‘예상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우리 부모님 세대의 아버지들은 문자 그대로 입을 옷이 없는 비상 상황에 빠지고 만다.

출처: ⓒtvN
여행 복장만으로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꽃보다 누나’ 여성 출연자들

물론 다 자업자득이지 뭘 어쩌라는 거냐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패션 자체를 귀찮게 여겨 온 건 그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같은 것만 입고 다니니 의류 시장이 중장년 남성들을 주요 고객으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남성들을 위한 ‘신상’이 희귀한 건 당연하다 등등. 뭐,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한국 의류 산업이 그렇게 흘러 왔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걸 이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


만약 정말로 대부분의 남성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옷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옷에 관심을 갖고 잘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은 ‘노답’이다. 이들은 20~30대 청년들이 입는 옷을 마지못해 소화하거나, 소량 생산되는 아주 비싼 제품을 입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옷을 입는다는 게 본의 아니게 ‘사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tvN
‘꽃보다 할배’의 남성 출연자들이 입고 나온 옷들

#아빠옷_바꿔드리기_긴급행동 참가합니다


물론 이건 고작 옷 몇 벌에 관한 얘기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프로틴쉐이크를 개발한 뒤에도 굳이 단백질 풍부한 소고기를 구워 먹듯, 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고 감싸는 피복의 용도 이상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중년 남성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그들이 옷에 무관심한 것이, 과연 그들에게 패션 자체가 불필요하고 부당한 것이어서일까? 어쩌면 이들은 패션이 쓸데없는 일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관심을 못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지금의 20대 남성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들이 입을 옷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이건 꽤 심각한 문제다. 한때는 기장을 줄이네 핏에 맞추네 액세서리를 꽂네 하며 최선을 다해 멋 내고 가꿔 자기의 삶을 누리던 이들이, 가부장이 되자마자 그 경험을 고스란히 잃어버리고 이후 몇십 년 동안 모두 같은 복장으로 걸어다닐 거라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의 코디 빈곤 문제를 ‘고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가며 우스갯소리로 소비하고 싶지가 않다.

남성 코디 추천을 찾으면 맨 수트 코디만 나온다. 정녕 대안은 없는 겁니까?

이번 여행 때 달라진 우리 아빠의 코디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 신신당부가 먹혔던 건지, 출국 당일에 아빠는 생전 처음 보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왔다. 쑥스러운 듯 웃는 아빠의 모습을 본 나는,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며 냉큼 팔짱을 끼고, 출국 게이트 앞에서 인증 셀카를 몇 장이고 찍었다. 내가 머플러를 매 주며 “이렇게 해야 예쁘니까 풀지 마세요!”라고 하면, 당신이 손수 더 꼼꼼하게 그 매듭을 묶는 순간도 만끽할 수 있었다.


여행 내내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예쁘다고 멋있다고 아빠를 칭찬했고, 아빠는 당신의 옷을 꽤 마음에 들어 하셨다. 역시 세상에 ‘멋있다’ ‘ 예쁘다’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확신하건대 누구나 여건만 된다면 자기를 꾸미고 가꾸기를 굳이 꺼려하지는 않는다. 공항 라운지에서 아빠와 찍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소망해 본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더 많은 아버지들이 그 가꾸기와 칭찬의 행복을 누릴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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