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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하게 닮은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

조회수 2020. 11. 1. 09: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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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국의 통일을 실현하면 어김없이 한반도와 베트남에 영향력 확대를 기도했다.

최근 박정희 정권 때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그로 인한 베트남 측의 희생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베트남과 우리 한국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너무도 절묘하게 닮아있다. 


중국은 항상 자신들의 분열을 종식하고 통일을 실현하면 어김없이 한반도와 베트남에 영향력 확대를 기도했다.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인접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오랜 기간 중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시대별 베트남 영토 변화

베트남은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베트남은 광동(廣東) 지방에 중심을 두고 중국에서 분리돼 나온 국가인 남월(南越)의 지배를 받았다. 남월의 건국자 조타는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기층민들은 대부분 월족이었고 지도층에도 월족이 많았다.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 무제가 남월을 병합했는데, 당시 한나라는 북베트남 지역에 9개의 군, 즉 한구군을 설치했다. 공교롭게도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도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됐다.


그 뒤 7세기에 들어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베트남 정복에 나서 고구려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베트남 공격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 뒤 679년 당나라는 북베트남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


이후 베트남은 불교가 융성하게 됐고, 3국통일을 이룬 신라도 불교국가라 할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더구나 대승불교라는 점도 양측이 동일하다. 당시까지 베트남이 한국에 비해 중국의 직접 지배를 더욱 오랫동안 받은 것은 베트남이 지리적으로 중국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베트남에는 국가적 주체의식을 가진 상류 계층이 형성됐다. 베트남의 중앙권력이 계속 몰락하고 중국이 5대 10국 시대에 들어 혼란에 접어들자 939년 베트남은 드디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다. 한국 역사 중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독립적이었던 고려 왕조가 세워진 것은 이 시기와 비슷한 918년이었다.

베트남 딘 왕조의 건국자, 딘보린

물론, 당시 베트남은 중국과의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베트남에 딘보린(丁部領, 정부령)이라는 민족 영웅이 출현하면서 전국을 통일하고 968년에는 황제를 칭했다. 당시 베트남과 고려가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5대 10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고 송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송나라가 문치 국가로서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나라는 베트남을 두 번 침략했지만, 베트남의 매서운 반격에 모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국 대륙에 세계 최강 원나라가 건국됐다. 원나라는 하노이를 세 번이나 점령했지만, 베트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매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원나라는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는 대신 조공 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베트남은 계속된 외세 침략으로 민족의식이 강해졌다. 몽골의 거센 침략을 받으면서 건국 신화를 탄생시켰다. 한민족도 몽골의 침략을 받은 13세기에 민족적 각성이 일어나면서 일연 스님이 단군신화를 정리해냈다.

베트남 레 왕조의 초대 황제, 레 러이

명나라의 대외 팽창기였던 영락제 때인 1406년 베트남이 명나라에 조공 관계를 인정하지 않자 영락제는 군사를 이끌고 베트남 공격에 나서 하노이를 정복했다. 그러나 레 러이의 영도 하에 20년 동안 독립전쟁이 전개됐고, 수세에 몰린 명나라 군대는 마침내 철수했다. 대신 베트남은 중국과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맺는다. 같은 시기 조선은 명나라에 대항하지 않고 스스로 조공 관계를 인정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베이징에 정도한 이래 베트남은 한국보다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자주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이때 나라 이름을 대월(大越)이라 불렀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중국에 조공할 때는 스스로 왕으로 낮췄다.


한편 베트남은 오랫동안 자국 문자를 가지지 않고 한자를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하노이는 한자로 ‘하내(河內’이고 그 중국어 발음은 ‘허네이’다. 발음까지 중국어 혹은 우리 독음과 유사하다. 18세기에 이르러 베트남은 한자음을 빌어 구어를 옮겨 쓰는 ‘쯔놈(字喃, 자남)’이라는 자국 문자(우리나라의 이두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이후 포교를 위해 베트남에 온 예수회 성직자들이 베트남 구어의 음을 라틴어의 알파벳으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로마자로 표기하는 이 방식의 문자가 오늘날 베트남어 표기 방식으로 됐다.

베트남과 한국의 유사성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식민 통치를 받은 경험과 그 뒤 외세에 의한 남북 분단 역시 동일하다. 또한 세계 최강 미국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곳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이었다. 6.25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전쟁이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베트남과 한국, 우호와 미래로

베트남 파병 부대 사열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면서 일본에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월남전 참전은 미국의 종속적 위상에 놓인 국가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벌인 사건이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우호와 미래를 위해 지난 과거에 대한 상응하는 반성은 필요하다.


특히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상호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에 대응해 서로 연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양국관계의 건강한 발전을 기대하는 이유다.


by 소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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