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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생존자는 그곳을 ‘지옥’이라 불렀다

“조국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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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징집 생환자 최장섭(88)씨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고생은….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 군함도(端島·하시마)로 강제징용 생환자들은 그 섬이름 세 글자에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군함도 생환자 최장섭(88)씨는 기자가 첫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일본놈들같이 지독한 놈들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15살이던 1943년 징용됐다는 최씨는 “사면이 바다인 하시마에서 ‘감옥생활’을 3년간 했다”며 “속옷만 입고 탄광 밑바닥에서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혹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한을 토했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에 있는 야구장 2개 크기의 작은 섬이다. 나가사키 항에서 18km 떨어져 있다. 원래 이름은 하시마이지만 군함 모양이라서 군함도라는 별명이 붙었다.


태평양전쟁 때 군함도에서는 일본 최대 군수기업이었던 미쓰비시가 탄광을 운영했다. 탄광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강제징용된 조선인이나 중국인이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39∼1945년 조선인 약 800명이 군함도로 끌려갔고, 134명이 숨졌다.

이곳 탄광에서 조선인 대부분은 갱도 깊숙한 곳에서 석탄을 캐거나 석탄을 캔 부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틈을 메우는 작업을 했다. 최씨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주땡’(탄광 캔 자리를 메우는 일)을 맡게 되자 일본인 감독들이 ‘젊은 놈이 안 됐다. 돌이 떨어져서 머리가 터지기 일쑤’라고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낙석에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회상했다.


최씨와 동료들은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작업을 하면서 ‘콩깻묵밥’이라 부르는 콩밥 한 덩어리로 끼니를 때웠다. 그마저도 갱도 안까지 침입한 쥐가 갉아먹곤 했다. 최씨는 “조국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군함도 생환자 이인우(92)씨

이씨는 “속옷만 입고 이마에 조명을 붙인 채 갱도에서 일했다”며 “하시마에 8개월가량 있다가 스무 살이 돼서 일본군에 징집됐는데 오죽하면 군에 가면서 ‘이제 살았다’ 싶더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본은 군함도가 ‘비(非) 서구지역에서 최초로 성공한 산업혁명 유산’이라며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대표는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했고 섬 내부에 강제징용 사실을 표기한 안내판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당국은 “해당 표현은 ‘일 시킴을 당했다’라는 의미”라며 강제노동을 인정한 게 아니라는 취지로 입장을 바꿨다. 안내판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한 기한이 5개월가량 남은 현재까지 설치 계획이 수립됐다는 소식은 없다. 문화유산 등재 이후 군함도는 일본 내 인기 관광지로 부상해 배편을 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김용봉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문화유산 등재가 취소될 수 있어서 일본이 안내판 설치를 하리라고 본다”며 “설치되지 않는다면 민간 차원에서 방법을 강구해보겠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때 지급한 3억달러로 강제징용 피해를 보상했다는 입장인데, 당시 그 돈은 포스코와 도로공사 같은 공기업에 지원되느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구권협정에 수혜를 입은 공기업들이 지금이라도 강제징용 피해자·유족을 위해 지원해야 한다”면서 “피해 지원과 재단 존속을 위한 특별법도 국회에서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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