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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린 왕자' 작가의 최후

조회수 2020. 10. 25. 10: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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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공식 사인은 '실종'이다.
▲ 비행복을 입은 생텍쥐페리. 프랑스에서 그의 저작권은 2045년에 만료된다.

생텍쥐페리, 마지막 정찰 비행 중 실종되다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정찰기 P38라이트닝을 타고 출격한 <어린 왕자>의 소설가이자 ‘야간 비행’의 선구자 앙투안 마리 장 밥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1900~1944)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비무장으로 6시간분의 연료를 싣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귀환하지 않았다. 8시간 반 뒤에 실종 보고가 들어와 그는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가 됐다. 1948년 프랑스 당국은 그의 실종을 사망으로 보고 전사로 인정했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비학위과정 청강생으로 파리 국립미술학교 건축학과에 15개월쯤 적을 두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공부보단 대학가 카페와 센 강변의 호텔 방을 오가는 파락호의 생활을 즐겼다. <어린 왕자>의 삽화는 이 시기에 익힌 것이었다.


1921년 육군에 징집돼 항공정비병으로 근무했다. 이때, 자비로 민간항공기 조종훈련을 받고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2년에는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따고 육군 사관후보생 과정에 입교, 예비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제34항공연대에서 근무하다가 항공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돼 소위로 의병 전역했다.


타일제조회사와 자동차판매 대리점에서 근무하다 사직하고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해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한 게 1926년이다. 같은 해 항공사에 취업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를 받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세네갈의 다카르 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

▲ 생텍쥐페리는 군대에서 항공기 조종을 시작한 이후 죽을 때까지 비행기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이듬해에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으며 불시착 항공기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병행했다. 같은 해 최초의 장편소설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써 작가로 데뷔했고 3년 뒤인 193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를 출간했다.


그해 두 번째 소설 <야간 비행(Vol de Nuit)>을 써 이듬해 이 작품으로 페미나 문학상(Prix Fémina)을 받았다. 페미나 상은 콩쿠르상(1903)의 제정될 때 선정위원이 모두 남자인데 반발해 이듬해 선정위원을 여성만으로 구성해 제정된 상이다. 이 소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생텍쥐페리는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조종을 계속하면서 비행시간 단축 장거리 비행 경기 중 기체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기도 하고 과테말라 상공에서 엔진 폭발로 불시착해 크게 다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조종간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페미나상 수상 이후 유명작가로 부상

▲ 생텍쥐페리가 그린 어린 왕자

절친 앙리 기요메(Henri Guillaumet)가 남미 횡단 중 안데스에 추락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는 1939년 발표한 단편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 반영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하는 병사가 물품을 공급해주는 공군 조종사가 오는 날을 기쁘게 기다린다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외로움을 묘사한 이 소설로 생텍쥐페리는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의 소설 대상을 받았다.


1939년 2차대전 발발을 앞두고 생텍쥐페리는 예비군 동원령으로 징집, 공군 대위로 임용돼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이듬해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대공화기를 뚫고 감행한 정찰 비행으로 사진을 촬영해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가 나치에 함락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1년 뉴욕에서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썼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는 문제의 소설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를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동시 출간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작품으로 그는 전 세계에서 지명도를 높일 수 있었다.


스스로 삽화까지 그린 <어린 왕자>는 동화라고 하지만 아이들에겐 오히려 어려운 책이다. 이 책은 삶에 찌들어 관계의 본질과 진실을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훨씬 유용하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거나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유명 대사가 겨냥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 생텍쥐페리의 소설들. 그는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은 뒤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무렵, 그는 비시 정부로부터는 일방적으로 정부 요직에 임명되고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로부터는 ‘친독’ 인사라는 색깔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이에 생텍쥐페리는 프랑스 공군에 재입대함으로써 이 논쟁을 돌파하기로 했다.



재입대 후 정찰비행 중 실종, 전사 처리


43세였던 그는 나이 제한을 초과한 데다가 부상 후유증도 극심해 조종사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저명 작가로 군부 지도자와 친한 덕분에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1944년 7월 그의 비행대는 코르시카 바스티아 인근 기지로 이동해 8월 15일로 예정된 남프랑스 상륙작전(드래곤 작전)을 위한 상륙지역 지도제작용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날 그는 공군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으로 단독비행에 올랐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생텍쥐페리의 정찰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인근 지중해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됐다. 1998년 4월 마르세유 남동쪽 해저에서 한 어부가 우연히 그물로 생텍쥐페리의 이름이 적힌 팔찌를 인양함으로써 그의 행방이 마침내 밝혀졌다. 수중탐사 장비로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도 찾아냈다.


2008년에는 그의 정찰기를 격추했다는 독일군 조종사의 증언이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 독일군 정찰기에 격추됐다는 그의 비행기에는 총탄 자국이 전혀 없는 등 의문점은 적지 않다. 바다에서 건진 팔찌가 가짜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가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숨진 사람들(Mort pour la France)의 저작권을 추가로 보호하는 프랑스 저작권법에 따라 생텍쥐페리의 저작권은 30년간 추가로 보호받는다. 그의 작품 저작권은 다른 나라에서는 2015년부터 소멸했지만(퍼블릭 도메인), 프랑스에서는 2045년까지 보장되는 것이다.

▲ 유로화 이전의 프랑스 고유 화폐에 실린 생텍쥐페리 초상 등

그가 태어난 도시 리옹(Lyon)은 관할 국제공항을 생텍쥐페리에게 헌정, 생텍쥐페리 국제공항이 됐다. 1975년 11월 2일에 타마라 미하일로프나 스미르노바가 발견한 소행성에 ‘2578 생텍쥐페리(Saint-Exupéry)’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린 왕자가 살고 있었던 ‘소행성 B612’는 프랑스에선 베시두즈(Bésixdouze)라 부르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B612’를 차례대로 읽은 발음이라고 한다.



국가 위해 싸우다 숨져 저작권 30년 추가 보호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유로화 채택 전까지 고유 화폐인 프랑스 프랑을 사용했다. 그 가운데 4차 형태의 50프랑 지폐에는 생텍쥐페리의 얼굴과 그의 비행기, 비행기의 이동 경로, 어린 왕자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그려져 있었다.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됐지만, 우리는 늘 작가가 어린 왕자를 만난 사막을 기준으로 그를 기억한다. 문학의 자장(磁場)이 가진 힘이다. 항공기 조종사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불시착을 마치 우리 자신의 직접 체험인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생텍쥐페리 덕분일 것이다.


체험을 토대로 한 소설로 명성을 얻은 생텍쥐페리의 문학은 ‘행동주의 문학’으로 평가된다. 그는 “위험 상황 속에서 높은 인간성과 연대 책임 등을 실천적 관계에서 택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작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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