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말이 이상한 이유

조회수 2020. 8. 29. 13: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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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특권에 대한 인지가 없으면 공개적인 발언에서 헛소리가 늘어난다.

예전에 한참 여행을 다닐때 여행 중에 친해진 영국인과 이런 저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한 일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국의 고용시장에 관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는데, 편견에 의한 낙인찍기에 관한 이야기와 한국의 고용시장이 상당히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 영국인 친구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준, 너는 영어도 잘하고(실제론 잘 못한다. 그냥 겁 없이 말을 막 던지는 건 좀 잘해도) 대학도 졸업한 고급인력이니 자국 내에서 취업이 힘들면 해외에서 취업을 하면 되잖아? 나도 그렇게 일했었어 "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친구에게 한마디 했다.


"야 그건 니가 선진국 백인 남성이니까 그렇지. 선진국 출신 백인 남성은 자국을 벗어나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많지만 난 그렇지 않다 "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전체 사회에서 얼마만큼 상위에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특권이란 것이 내가 누릴 때는 지극히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속성을 갖고 있는 만큼, 특권이 특권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어디가서 전체를 대상으로 얘기할 때에는 그 전에 내가 누리는 것이 전체의 몇%가 누리는 것인지를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헛소리가 나오게 된다.


가끔 '대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과 같은 워딩을 보는데, 아마 이걸 쓰는 사람은 이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 거다. 사실, 대기업을 다닌다는 것에서 일단 평범과는 아득히 멀어진다.

대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2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2015년 기준 24%). 이 중에서 다시 40% 가량은 파견이나 계약직 등의 비정규직이다. 그러니 일단 대기업 정규직이기만 해도 고용 근로자의 상위 12% 안에는 드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 '평범한' 직장인이 회사에만 잘 붙어 있다면 얻게 되는 근로소득은 무조건 상위 5% 이내에 들어간다. 만약 사내 결혼 혹은 비슷한 대기업에 일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할 경우 얻게 되는 가구 소득은 그보다 더 상위로 올라간다.


여기에, 과거에도 쓴 바 있지만 이러한 근로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금융 접근성은 아무나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 이름으로 신용대출을 거의 담보대출 금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공받는 것은 절대 '평범'하지가 않다. 이게 어딜 봐서 평범인가.


나는 내가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에 못해도 현업에서 10년 이상 일했을 거래처 차장이 겨우 신입이었던 내 월급, 그것도 MB때문에 25% 삭감을 당했던 급여 수준에 불과했던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또 그 당시 타 은행의 신용대출 권유 전화 - 내 연봉의 3배까지 신용대출 해주겠다는 - 를 하루가 멀다 하고 받았었다. 물론 신청하진 않았지만 필요한 준비물은 내 신분증과 재직증명서가 전부였다. 만약 그 거래처 차장님이 신용대출을 신청하려 했다면 많아봤자 당시 내 1/3에 불과한 신용대출 한도에 필요한 준비물도 많고 금리도 나보다 50%는 더 높게 나왔을 것이다.


비슷하게 '평범'한 사람들 끼리 모였을 때 자신의 '평범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된다. 본인은 별 생각 없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 중, 다른 사람들은 평생을 가도 근처에 가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니 자신의 특권에 대한 인지가 없으면 공개적인 발언에서 헛소리가 늘어난다. 예전 모 신문의 부장님이 지면을 할애해서 썼던 '미친 전세가 싫어 분양받은 주택을 팔고 공공임대주택을 갔다'라는 서민코스프레가 그것이고, 배우자는 의사에 본인도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나같은 서민이 살기에 너무 힘들다"라는 발언을 내뱉은 게 그것이고 최근 전 민주당 대변인 정은혜가 한 발언도 바로 그것이다.



본인이 누리는 특권과, 본인이 지금 거두는 소득이 전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상위권에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인식이 없다면 헛소리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 강연장에 가서' 자신은 가진 게 없었으나(명백히 시작부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서 더 큰 성취를 거뒀으니 여러분도 열정과 노력으로 힘내라'는 어이 없는 소리를 진지하게 떠든다.


그러니 한 번쯤은 자신이 정확히 어디 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게 좋다. 특히나 남에게 훈계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본인이 살기 힘들어서 쉰소리 하는거? 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필요하다.


by 김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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