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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와서 주먹자랑 마라' 전설 만들어낸 머슴 의병장

조회수 2020. 8. 15. 15: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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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병을 맨손으로 때려 잡았다.
출처: 문화재청
▲ 1947년 보성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득량면 예당1리 파청에 의사안공파청승첩비를 세웠다.

의병장 안규홍,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

1910년 6월 22일 ‘담살이(머슴, 머슴살이)’ 의병장으로 불리는 안규홍(安圭洪,1879~1910) 선생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는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머슴살이 동지들을 규합해 창의(倡義)한 이래 파청(巴靑)·진산(眞山)·원봉(圓峰)대첩 등 의병 사상 기념비적 승리를 구가했던 보성 의진(義陣)을 이끈 이였다. 향년 31세.


안규홍은 호좌(湖左)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1849~1896), 영덕의 신돌석(1878~1908)과 함께 평민 의병장이었다. 너무 가난해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했던 그는 ‘안담살이’, ‘안진사’ 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안규홍은 전남 보성 출신이다. 본관은 죽산,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이다.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화하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1907)되자 안규홍은 1908년 2월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는 법화사(法化寺)의 ‘자위단’(도적들의 내침을 방어하기 위한 조직)을 주축으로 봉기할 생각으로 양반 유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의 신분을 꺼린 양반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보성의진이 거둔 3대 대첩


이에 안규홍은 보성 부근에서 활약하던 함경도 출신 의병장 강성인(姜性仁)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강성인의 부대가 주민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악행을 일삼자 지역 의병들이 강성인을 처단하고 안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안규홍의 보성 의진은 1908년 2월 동소산(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뒷산)에서 창의했다. 의진을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으로 편제했으며, 휘하에 염재보·송기휴·이관회·송경회 등의 장수가 활약했다. 의진은 보성을 중심으로 인근 흥양(고흥)·여수·돌산(여수)·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제의 군경을 상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파청(득량면 예당1리 버들고개)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순천 낙안에서 파견된 일본군 나가토(米戶)와 히라이(平井) 부대를 습격해 전멸시키고 다량의 무기와 서류를 탈취했으니 이 전투가 파청대첩이다.


또한, 진산(문덕면 귀산리 진산마을) 전투에서 승전한 후 원봉(복내면 복내리 원봉마을)에 주둔하던 기마 주둔소를 기습해 적 50여 명을 사살했다. 이들 전투가 파청대첩과 함께 보성 의진의 3대 대첩이라 일컬어지는 진산대첩, 원봉대첩이다.


뒤이어 일본군 헌병대가 대원사(문덕면 죽산리)로 접근해오므로 매복작전을 벌여 적 8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거뒀다. 또, 안규홍 의병은 동복(화순군 동복면)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부대를 화순군 운월치(화순군 동복면)로 유인해 매복작전으로 무찔러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서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 박도
▲ 안규홍의 고향 마을인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그러나 의진은 1908년 5월 서봉산(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참모 나창운을 비롯한 의병 25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참패를 당했다. 안규홍은 두 달 남짓 남해의 섬에서 은거하다 8월께 미력면 석호산에서 토착민들과 의병장 심남일, 안재찬 등의 후원으로 재기했다.


8월 광양으로 진군해 어업권을 장악한 일본 어민들과 측량대를 습격했으며 일제의 밀정인 일진회원과 소속 관리들을 처단했다. 9월에는 순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가령치로 유인해 격전을 벌였으나 선봉장 이영삼과 이관회, 유격장 안택환 등을 잃어야 했다.


안규홍은 잠시 부대를 해산한 뒤 은둔생활을 하다 1909년 3월에 의병항쟁을 재개했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았으나 일제의 간계임을 알아채고 ‘호남행군소대장(湖南行軍所大將)’이라는 이름으로 의병들을 이끌었다.


이어서 전해산(1879~1910), 심남일(1871~1910)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해 나주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군 헌병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안규홍 의병은 4월까지 보성·장흥·강진·화순 등지를 진군해 일본 군경과 부일 매국노를 처단해 명성을 크게 떨쳤다.


위기라고 판단한 일제의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는 1909년 4월 광주와 남원의 병력을 차출해 9월 1일부터 남해대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일제는 10월 말까지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를 비롯한 군함 수 척, 해군 11정대 등이 동원되는 대병력으로 의병을 섬멸하려 했다.


▲ 1910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의병장들의 마지막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안규홍 선생이다.

‘벌교 주먹의 전설’ 대구감옥에서 지다


9월 25일 부대를 해산하고 휘하 장수 염재보, 정기찬 등과 함께 귀향하던 길에 안규홍은 밀고로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일제에 체포됐다. 광주감옥에 갇혔다가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안규홍은 1910년 6월 22일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일부 자료에 순국일을 1911년 5월 5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대한제국관보 제4717호에 순국 관련 사실이 고시(융희 4년 6월 28일)돼 있다.


안규홍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부하들 가운데 박봉석·손덕오·정기찬(이상 1990 건국훈장 독립장)·염재보(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등도 같은 해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안규홍의 의병부대는 유생 중심의 의병운동이 점차 대중적 기반을 닦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병운동 전개 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대중화 경향은 1908년에서 1909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공간적으로도 초기 의병운동이 산악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점차 평원지대, 도시, 해안 지대로 확산해 가는 발전적 면모를 보이고 작전도 능숙한 게릴라전의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또, 양반 유생들과의 관계가 초기 의병운동에서보다 원만해지고 있었다. 

출처: 문화재청
▲ 안규홍 의병장이 담살이한 박제현의 집.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됐다.

이는 장기적, 전국적 투쟁에서 대중적 기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 이들이 지니던 전투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신분을 초월한 대등한 관계에서 의병진 간의 유대가 맺어졌으며 의병운동의 유기적 전개를 가능하게 한 전제조건이 만들어졌다.


안규홍이 순국하고 68일 만에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국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편입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이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면서였다. 

담산실기

1947년 보성 사람들은 득량면 예당1리 파청에 ‘의사안공파청승첩비’를 세우고 안규홍 선생을 광주 충효당에 배향했다. 그와 부장들의 의병 활동이 기록된 문헌으로 <담산실기(澹山實記)>가 있다.


안규홍이 고향인 법화마을에서 약 20여 년간 박제현(1871∼1909, 1990 건국훈장 애족장)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뒷날 박제현은 그의 휘하에서 군수장(軍需將)으로 활동했다. 이들이 살았던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됐다.


1세기 이전의 역사이긴 하지만, 담산의 독립투쟁과 순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벌교 장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살해한 게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마라’는 이야기의 연원이 된 이다. 그가 거둔 의병투쟁의 쟁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의 신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2016년에 보성군이 안규홍의 일대기를 창작극으로 만든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지역과 서울에서 무료 공연하면서 1세기를 넘어 그가 다시 소환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by 낮달


<참고자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보성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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