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윤동주에게 주사했다는 '액체'의 정체

조회수 2020. 8. 11. 16: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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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의문의 주사에 관한 이야기
▲ 시인 윤동주(1917~1945)

아이들과 함께 윤동주(1917~1945)의 「별 헤는 밤」을 공부한 것은 지난 학기였다. 그의 시를 읽거나,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나는 거기 각별한 울림이 있다고 느낀다. 특히 「별 헤는 밤」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아주 특별하다. 뭐랄까,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엄격한 시인의 태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진정성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와 그의 시가 꾸준히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도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진정성과 고결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윤동주는 모두 100편에 못 미치는 시를 남겼다. 그러나 현행 18종의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는 「서시」와 「별 헤는 밤」을 비롯하여, 「간(肝)」, 「길」, 「또 다른 고향」,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 「아우의 인상화」, 「자화상」, 「참회록」 등 모두 10편이다.



윤동주, 반역의 문인들 위에 빛나는 이름


문학사를 가르칠 때마다 느껴야 하는 열패감과 자조의 감정은 쓸쓸하다.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육당 최남선, 신소설 <혈의 누>의 이인직, 현대소설 <무정>의 춘원 이광수, 자유시 「불놀이」의 주요한에 이르기까지 처음으로 현대문학을 열었던 시인 작가들이 한결같이 민족반역자로 매겨야 할 이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서다.

▲ 내 서가의 유고시집(초판의 개정판 제18쇄)

대부분 문인이 자의든 타의든 친일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일제와 맞서 싸웠고, 그로 말미암아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던 육사나 동주의 삶은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짧은 삶이 던져주는 의미는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했다.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두고 그는 스물일곱의 생애를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베이징의 일본 대사관 감옥에서 이육사 시인이 순국한 지 꼭 1년 1개월 만이다. 이들 시인의 순국 앞에서 모국어를 빼앗긴 망국은 한스럽기 짝이 없다.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윤동주의 죽음은 오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내 기억으로 윤동주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은 1980년대 초반께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집에서 정기 구독하던 <문학사상>은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후배인 정병욱 교수 등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동주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래서 나는 늘 윤동주를 가르치면서 그 의혹을 덧붙여 국권 피탈기에 일제에 맞섰던 한 청년 시인의 모습을 상기시키곤 했다. 그런데 최근 SBS이 방영한 <그것이 알고 싶다> 광복절 특집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연출 한재신)가 그의 죽음 전후를 조명한 것이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이미 30여 년 전에 제기된 의혹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학창시절 축구 선수로 활약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힌 지 1년도 안 되어서 사망했다. 사망을 전후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그가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됐다


1945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던 이는 그의 당숙 윤영춘(가수 윤형주의 부친. 윤형주는 윤동주의 육촌 동생).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감 중이던 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당시 송몽규가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전했다고 증언했다. 송몽규도 3주 후 옥사했다.


문제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의문의 주사다. 이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 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취재진은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확인한 결과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한다.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 명은 산 채로 해부된 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

이 규슈 제국대학에서의 생체실험을 다룬 소설이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샤쿠의 <바다와 독약>이다. 엔도 슈샤쿠는 ‘신’과 ‘윤리’ 등 형이상학적 주제를 즐겨 다루는 작간데, 그는 초기 기독교 전교 과정에서의 ‘배교’ 문제를 다룬 <침묵>과 <그리스도의 탄생> 등을 썼다. 나는 <문학사상>을 읽었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한길사 판 세계문학전집에서 <바다와 독약>을 읽었다. 막연했지만 나는 윤동주의 죽음과 규슈제대의 생체실험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다와 독약>은 규슈제대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끔찍한 생체실험은 집도 책임자였던 이시야마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종전 뒤에 전범으로 기소돼 취조받다가 자살해 버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실험의 전모는 묻혀 버렸다. 이때 기소된 30여 명의 관계자는 교수형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일본인 간수들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신 기증이 예정됐던 곳 역시 규슈제대였다.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시기일 뿐이다. 그러나 정황 증거는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생리식염수 대신 바닷물을 주입한 규슈제대의 실험을 고려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일 가능성이 크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 나오게 되는데 이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시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 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식민지 청년 시인을 기억해내다


1943년 초여름, 윤동주는 동지사 대학의 영문과 동기들과 함께 교토의 한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그날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그는 한 달 뒤인 7월 14일,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가 아니라 주검이 돼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격동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던 조국은 스물일곱 살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된 것은 해방 3년 후, 1948년이다. 31편의 시를 싣고 있었던 정음사 판에 이어 1955년에 10주기에 93편의 작품을 담은 유고시집이 간행됐다.


비록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애로 우리 곁을 떠났지만, 윤동주는 아마 이 땅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인이 된 듯하다. 문익환 목사의 말처럼 사람들은 <서시>를, <별 헤는 밤>과 <참회록>을 읽으면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교토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달 뒤 그는 일경에 체포된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조국만이 아니다. 그를 가두고 종내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 식민지 종주국의 시민들도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교토에 그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시민들의 서명을 받으려는 이들(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이 있는가 하면, 윤동주의 시를 읽고 그의 생애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임(‘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도 있다. 그들은 윤동주의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그의 시는 아름답다. 몇 번씩 읽어도 눈물이 난다. 혼자 읽어도 그렇다…….”


윤동주를 읽고 이처럼 느끼는 이의 정서는 우리의 정서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자기 성찰을 그치지 않는 식민지 청년의 고결하고 따뜻한 영혼은 식민지 종주국의 국민조차 감화시킨 것일까. 그뿐 아니다. 일본의 중등학교 문학 교과서도 그의 시를 싣고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요절이라고는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반복해서 맞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 일본 고등학교 3학년 ‘문학’ 교과서 중에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뤄진 비극적인 가해와 피해의 역사가 있다. 그 시기를 정리하고 넘는 것은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기 역사 청산’이고, 일본에는 ‘전후 청산’이다. 그러나 그건 그리 만만찮아 보인다. 여전히 역사 왜곡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재무장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 여론이 꾸준히 제기될 만큼 일본 사회는 보수화로 치닫고 있다.


프로그램은 한일 대학생 캠프에서 한일 양국의 대학생들이 윤동주 시인을 배우고 그의 시를 낭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은 가고 없지만, 그의 시는 살아남아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긴 메아리를 남긴다”는 해설을 끝으로 이 다큐멘터리는 막을 내린다.


해설 뒤로 시인의 사진들을 배경으로 양국 대학생이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로 낭독하는 그의 시 <십자가>가 떠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해방 60년이 훌쩍 지났지만, 미완의 역사,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고, 그것은 그 어두웠던 시대와는 무관한 새로운 세대가 상속해야 할 우리 시대의 유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다시 읽는다. 그가 아파했던 ‘부끄러운 이름’은 진정 그 부끄러움을 벗었던가. 겨울이 지나고 우리의 별에도 ‘봄’은 왔건만, ‘이름자 묻힌 언덕’에 ‘자랑처럼’ 풀은 진정 ‘무성한’가. 해방된 지 64년. 그러나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고단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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