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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도 시어머니 전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조회수 2020. 8. 10. 16: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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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안 하면 '나쁜 며느리'가 된 기분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만 불편함을 즐길 수 있는 요령도 없고, 즐길 의지도 없는 나는 ‘즐길 수 없으면 피하자’는 주의로 살아왔다. 부당한 일들을 마주할 때, 적당히 맞추고 순응하며 즐기기보다 관계가 틀어질지언정 할 말을 하며 살았다.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기에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은 빨리 정리한다.


친구나 선배뿐만이 아니라 연구를 가장한 노동 착취를 일삼는 지도교수에게도 ‘이건 아닌데’하는 부분은 참지 않고 말하곤 했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누군가 해야 하는 말이 있으면 내가 했다. 나는 이런 내 성격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다만 내가 이런 성격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한 사람과 친밀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탐색하면서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고, 천천히 신뢰를 쌓은 후에야 관계의 거리를 좁힌다. 넓고 얕은 관계보다 좁지만, 확실히 심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관계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런 나의 관계 의지를 굴복시킨 최초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남편의 가족들’이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추억 하나 없는 사람들인데 나이, 성격, 가치관에 상관없이 갑자기 가족이 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됐다. 종교나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달라도, 취향이 달라도,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달라도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나누며 서로를 탐색하는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내 삶에 훅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시작이다.



며느리의 ‘안부 전화’

출처: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나라는 사람은 남편 가족들이 아니더라도 친한 친구나 친정 가족들에게조차 안부 전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전화는 꼭 용건이 있을 때나 하는 거고 ‘어쩌다 가끔’ 정말 잘 지내는지 궁금해지면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니 시가에 전화를 하는 일이 내 의무처럼 주어졌다.


전화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제때 전화를 받지 않거나 하지 않으면 마음이 영 찝찝해 깍듯하게 “네네~” 답하곤 했다. 안부 전화를 안 하면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고 ‘나쁜 며느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친정에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하지 않았고 전화를 왜 안 하냐는 질문을 받지도 않았는데 왜 여자인 나만 이토록 안부 전화에 마음을 쓰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을 고민했다. 그들이 먼저 태도를 바꾸기 힘들다면 내가 변화의 주체가 돼 관계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며느리에 대한 기존 틀을 깨고 며느리가 왜 약자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반문했다. 며느리와 나를 분리하고 관계에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하면서 거리를 뒀다. 스스로 며느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 되고자 했다.


누군가 내게 전화할 자유가 있다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자유 또한 내게 있다. 내 뜻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걸려오는 전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내 몫이라면,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괘씸하고 답답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상대의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도 다시 확인 전화를 하지 않았다. 명절이나 가족 행사가 있을 때면 시가 어른들은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는 며느리에 대한 서운함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누구네 며느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한다더라’, ‘노인들에게는 전화만한 효도가 없다’ 등의 말씀을 하곤 했다. 그때는 남편을 끌어들였다.


“애들 아빠가 요즘 바쁜가 보네요~ 안부 전화 안 해요?”


“당신 안부 전화 안 드려? 어머님 서운하시게 왜 전화를 안 해?”



시가에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남편이다. 상대의 일상이 궁금할 만큼 친밀한 관계는 하루아침에 강압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충분히 쌓여야 가능하다. 공감대 없이 갑작스럽게 의무와 역할로 거리를 좁히려 한다면 부작용이 따른다.



나는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

출처: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남편 가족들과 며느리 사이에는 독특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말하기 어렵고, 회사원이 직장 상사나 대표에게 말하기 어렵고,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이 무례한 손님일지라도 참고 받아주듯,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낮은 자세를 취한다. 자유롭게 말하거나 행동하기 어렵다.


결혼 전 성격대로라면 즐길 수 없는 이 관계를 피해야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갑’의 위치였던 지도교수에게도 할 말을 꼬박꼬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나의 관계가 둘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관계가 틀어지는 결과는 내가 혼자 감당하면 됐다. 그와의 관계를 청산한다고 해서 대단한 죄책감이 남지는 않는다. 후련할 뿐이다.


그러나 결혼 후의 가족 관계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편과 아이들, 친정 식구들의 감정까지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다. 결혼 후 관계 맺기는 결혼 전 관계 맺기보다 난도가 훨씬 더 높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인연을 끊겠다 하면 많은 사람이 불편하다. 홀가분하기보다 찝찝함이 남으니 칼로 무 자르듯 내 뜻대로 처신하기 어렵다. 어영부영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의문은 계속 쌓였다. 억지웃음을 짓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이런 관계가 건강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나는 계속 소모되고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며느리의 삶에 대해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을 안 하는 며느리가 사랑받고 행복한 거라고. ‘나’라는 자아를 내려놓고 ‘며느리’라는 배우가 돼 충실하게 역할극을 하면 무탈하게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적당한’ 관계보다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



며느리는 ‘폭력’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와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온전한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해야 한다. 힘의 논리가 작동해서는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열리기도 전에 ‘며느리’의 위치에서 의무적으로 가까워져야만 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뭘 싫어하는지. 하나씩 탐색하면서 코드가 맞는지를 살피고, 잘 맞는 공통 주제를 찾으면 조금씩 친해지는 게 건강한 관계다. 충분히 마음이 통할 때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가와 며느리의 관계도 그래야 한다.


우리 사회의 며느리들은 관계에 끌려다녔다. 지나치게 낮은 자세로 살아왔다. 늘 평가받고 재단 당하고 정해진 역할에서 벗어나면 비난을 받았다. 며느리가 어떤 말을 싫어하는지, 어떤 시간을 지루해하는지 상관없이 대부분의 시가는 며느리에게 거침없이 행동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며느리는 신체적, 물리적, 언어적, 정서적인 영역을 침범당하며 살았다. 그 권력을 용인해줬기 때문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왜 며느리는 늘 약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나? 며느리는 약자가 아니다. 동등하게 대우하며 천천히 신뢰를 다져야 하는 ‘한 사람’ 이다.


올해 결혼 7년 차.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를 떨어트리고 사람 대 사람으로 가볍게 관계를 이어온 시간이 쌓이니 이제야 진심으로 그들이 궁금해진다. 내가 약자라는 피해의식도 사라졌고 시가 사람들을 향한 적대감도 줄었다. 내 마음의 부담이 줄면서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었다. 가벼운 관계가 더 깊은 정을 만든 셈이다.


며느리는 그동안 철저하게 시가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요구당했다. 며느리의 욕구를 살피고 요구하는 일은 낯설다. 하지만 시가와 며느리의 관계가 더 건강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질서를 깨야 한다. 며느리는 건강한 관계에 대해 욕심을 부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폭력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폭력 없는 관계가 오래간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 아닐까.

by '부너미'  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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