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까지 바꾼 1세대 여성운동가 이희호 여사

조회수 2020. 8. 7. 09: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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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희호 여사 결혼사진

그녀가 결혼할 때 모두가 말렸습니다. 어떤 이는 눈물까지 흘리며 안 된다고 그녀를 설득했고, 선배들은 결혼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미국 유학 등 엘리트 지식인의 길을 걸으며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주목받던 그녀는 바로 이희호였습니다. 마흔 살의 신부가 된 그녀의 신랑은 정치 낭인으로 두 아이, 심장판막증 앓는 여동생, 몸 성치 않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빈털터리 김대중이었습니다. 결혼 당시 그는 서른여덟 살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희호의 외삼촌 이원순의 한옥 대청마루에서 진행됐습니다. 빈손이었던 신랑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신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신랑이 얼마나 돈이 없었던지 결혼반지도 신부 측에서 준비할 정도였습니다.


결혼식에 모인 신부 측 하객은 가족, YWCA 선후배 등 100여 명이 넘었지만, 김대중의 하객은 두 동생을 비롯해 몇 명 남짓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1962년 5월 10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내 이름을 문패에 달았던 남편

출처: 김대중평화센터
▲ 1963년 김대중은 동교동 작은 주택을 사면서 아내의 문패를 함께 달았다.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자란 모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토머스 모어라는 세례명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결혼하면 남편의 종교를 따라가는 당시 풍습과 다르게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결혼 후 문패를 만들며 이희호 여사의 이름도 함께 새겼습니다. 가부장적 의식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를 동지로 대했고 서로 존댓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역시 가부장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서는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한 번도 남편에게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내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의 별명은 ‘다스’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1세대 페미니스트입니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닐 때 이희호 여사의 별명은 독일어에서 중성 관사를 뜻하는 ‘다스’(das)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떠올리던 ‘여성’의 이미지와 차별화된 모습에 이러한 별명이 붙었습니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 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또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음료수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이희호 여사)

출처: 김대중평화센터
▲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축접자에 투표하지 말라’는 피켓을 든 축첩반대 시위 모습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한 이희호 여사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피란 생활 중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참여했지만, 활동이 군 위문 공연에 치우치자 1년 만에 조직을 떠났습니다.


이후 1952년에는 여성계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조직, 이후 남녀차별 철폐 운동을 통해 가족법 개정까지 끌어내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호주제 폐지까지 이어진 여성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 램버스대학, 스캐리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까지 밟고 돌아온 이희호 여사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운동을 전파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추진한 캠페인 중 하나는 ‘혼인신고를 합시다’였습니다. 당시에는 축접자, 즉 첩을 두고 사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이 남성들이 첫 결혼에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첩을 들여 혼인신고를 하게 되면 첫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쫓겨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혼인신고를 합시다’는 일부일처제를 현실화시켜 여성을 보호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캠페인의 연장으로 이희호 여사가 활동했던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는 국회의원 선거 때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라며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독재하면 내가 타도하겠다”

▲ 1971년 대전 유세에서 찬조 연설하는 이희호 여사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 후보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찬조 연설을 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중 대전 유세에서 이희호 여사는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희호 여사는 “22만 명이나 많은 여성들의 주권 행사에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며 여성 유권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희호 여사를 영부인으로만 기억하지만,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성’과 ‘인권’이었습니다. 차별받는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그녀는 정치인 김대중을 선택해 꿈을 이루도록 동지로서 도왔고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가 2019년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습니다. 이후에도 이희호 여사의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행보가 많은 사람에게 기억됐으면 합니다.


by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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