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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10개의 인질 사건

정치적 거래를 위한 인질극은 1949년 제네바 조약에 의해 전쟁 범죄로 명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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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인질을 잡는 행위는 꽤 오랫동안 용인돼 왔다. 고대나 중세 시대에는 다른 나라와 조약이나 협의를 맺을 때 서로 상대방에게 배신당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고 로마 제국 시대에도 주요 인물의 자녀를 인질로 삼아 속주의 충성심을 확인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국가 간 정치적 거래에 인질을 사용하는 행위는 거의 사라져 갔다. 그러다 1949년 제네바 조약에 의해 전쟁 범죄로 명시되었다.

오늘날 인질을 잡는 건 범죄자나 정서가 불안정한 개인 또는 테러리스트들에 한정되어 있다. 인질을 잡으면 상당한 관심을 끌어모아 몸값을 받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슬람 국가 같은 조직은 인질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군사 활동 자금을 조달했다. 수십 년에 걸쳐 서구 열강의 중동 군사 활동에 저항해 온 조직도 인질 행위를 행해 왔다. 여기, 그간 일어난 역사상 최악의 인질사건 10개를 소개해 본다.



10. 8월의 위기 - October Crisis (캐나다 1970년)

1970년 10월 5일과 10일, 영국의 상급 무역 위원 제임스 크로스와 퀘벡 주의 노동 대신의 피에르 라 포르투가 각각 납치됐다. 캐나다 정부는 과격 분리주의자 그룹 퀘벡해방전선(FLQ)에 의한 2건의 납치 사건에 대해 전시 상황을 발동했다.


FLQ의 목적은 테러 혐의로 잡힌 동료 테러리스트들의 석방 협상이었다. 하지만 정부와의 협상이 순탄치 않게 흘렀고 일주일 뒤, 라 포르투의 시신이 공항에 주차된 차 안에서 발견된다. 또 한명의 인질인 제임스 크로스는 유괴범을 캐나다에서 추방하라는 협상 끝에 풀려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9. 뮌헨 올림픽 인질 사건 - Munich Massacre (독일 1972년)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 도중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그룹이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 11명을 인질로 잡았다. 무장 단체는 새벽에 이들을 습격해 잠들어 있던 선수와 코치를 제압했다. 그중 두 선수는 저항하다 그 자리에서 피살됐다.


무장 그룹은 팔레스타인인과 독일인 죄수의 석방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인근 비행장에서 반환하기로 상호 합의했다. 그러나 서독 당국은 협상 도중 몰래 9명의 인질을 빼내려 했고 이 작전이 실패하며 바로 총격전으로 사태가 확산됐다. 그 결과 인질 전원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사망자는 모두 17명이었다.



8.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 US Embassy In Tehran (이란 1979년)

1년 이상 동안 지속된 인질 사건의 하나. 1979년 11월 4일 이란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거주하던 미국측 직원 등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 사건은 그해 일어난 이란 혁명 결과 국왕이 미국에서 도망친 것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1980년 4월, 인질 구출을 모색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그 결과 항공기 2대 파괴, 무장공비 8명과 이란 시민 1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인질 사건은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에 따라 이란이 미국과 대화할 여지가 생기며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1979년 이후 미국이 이란과 상호 관계를 끊는 것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7. 레바논 위기 - Lebanon Crisis (레바논 1979년)


레바논 인질 사건은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일반 서양인이 계속 납치됐다. 96명의 피해자들은 그 동안 내내 인질이 된 것이 아니라 대개 피랍 후 몇개월 만에 풀려났다. 레바논 납치 주동 세력은 당시 레바논과 내전을 벌이고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던 과격파 조직 헤즈볼라였다.


감금 중에 인질 8명이 주로 건강 문제로 숨졌지만, 일련의 납치는 이란과 이라크 전쟁 종식과 소련의 붕괴로 끝났다. 소련의 원조에 의지하던 시리아와 이란은 1990년대 초반, 외국 자본이 절실했고 그 때문에 헤즈볼라 양측에 서양인 납치를 그만두도록 압박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6. 리비아 외국인 납치 사건 - Libya (리비아 1984년)

1984년 4월 17일,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 정부에 의해 4명의 영국인 남자가 납치됐다. 리비아 측은 맨체스터와 런던에서 일어난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영국 측에 붙잡혀 있던 4명의 리비아인과의 교환을 요구해 왔다.


1985년 초, 영국은 리비아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이 이루어졌는데 리비아 측은 영국 정부에 몇 가지 조건을 더 들이댔다. 그 중에는 영국 국내에서의 반 리비아의 선전 활동을 그만두는 것 등이 포함돼 있었다.



5.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건 - Moscow Theatre (러시아 2002년)

2002년 10월 23일, 모스크바 극장에서 체첸 무장 세력이 850명의 인질을 잡았다. 폭탄옷을 입은 채 관중석 중심으로 대형 폭파 장치를 설치한 범인들은 인질 석방에 대한 조건으로 제2차 체첸 분쟁에서의 러시아 군 철수를 요구했다. 극장은 2일 동안 포위되었는데, 그 사이에 인질 여성 2명이 피살됐다.


러시아 특수 부대가 범인을 무력화하기 위해 극장에 독 가스를 날렸지만 그것이 빗맞아 인질 130명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특전 부대가 건물에 들어가 인질범들을 모두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4.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 - Beslan School (러시아 2004년)

2004년 9월 1일, 이슬람 무장 집단이 러시아 북 오세티야 공화국 베슬란시의 공립 학교를 습격해 아이들 포함한 1,100명 이상을 인질로 잡았다. 범인들은 체첸의 러시아 군 철수를 요구했다. 크렘린은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일절 거절하고 포위 3일 만에 치안 부대를 학교에 투입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린아이 186명을 포함해 최소 385명이 죽고 7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훗날 인질과 희생자 수를 적게 발표하거나 범인들의 특별한 요구는 없었다고 주장한 푸틴 정권은 사건을 가볍게 처리한 것에 대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3. 이스라엘 병사 인질 사건 - Gilad Shalit (팔레스타인 2006년)

2011년 10월 18일, 이스라엘 병사 길 애드 샬리트는 하마스에게 5년이나 감금당한 후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샬리트는 2006년 6월 가자지구의 경계선에서 하마스의 습격을 받고 납치 됐다.


이 납치 사건에 따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갈등이 고조되고 2006년 여름에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에서 1,027명의 팔레스타인 죄수를 석방함으로써 샬리트도 풀려났다.



2. 탈레반 미군 병사 인질 사건 - Bowe Bergdahl (아프가니스탄 2009년)

2009년 6월 30일, 미군 병사 보우와 버그달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에서 나오자마자 탈레반에 납치됐다. 이들은 2011년 8월에 도망쳤지만 다시 잡혀 2014년 5월 말에 죄수 교환으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이 두 명의 미 병사들은 미군 부대에서 스스로 나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2009년 부대를 떠나가기 전 가족에게 메일로 전쟁의 잔혹성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부대에 있기 싫다며 토로했다고 한다.


1. 시드니 카페 인질 사건 - Sydney (호주 2014년)

2014년 12월 15일, 시드니의 상업 거리에 있는 카페에 이슬람 성직자 샤이후라고 밝힌 만 하론 모니스라는 남자가 침입해 17명을 인질로 잡았다. 최초 언론은 이슬람국의 테러라고 생각했지만 곧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모니스의 단독 범행으로 판명되었다.


모니스는 다양한 혐의로 오랫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당시는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인질이 억류된 지 16시간 후인 16일 경찰이 카페 진입을 시도했고 이때 2명의 인질이 숨지고 만다.


by 포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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