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통증을 평생 느끼는 'CRPS' 환자를 아시나요?

조회수 2020. 7. 9. 23: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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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한 올만 어깨 위에 내려앉으면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찌릿하다. 누군가는 '꾀병'이라고 했다.

나는 오후 3시에 출근해, 새벽 1시에 끝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저시급 6030원과 주휴 수당은 꿈꾸지 않았다. ‘불완전한 몸’을 받아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손님이 드문 밤마다 영업용 밴 한 대가 편의점 앞을 지나갔다. 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편의점을 감시라도 하듯, 천천히 한 바퀴 돌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단번에 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버지였다. 몸 성치 않은 아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불안해 순찰하던 나의 아버지.


나의 몸은 ‘불완전’하다. 머리카락 한 올만 어깨 위에 내려앉으면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찌릿하다. 누군가는 ‘꾀병’이라고 했다. 몇 번이고 MRI를 찍어도 어떤 뇌 신경 손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찬 바람이 불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누군가는 ‘정신병’이라고 했다. 대학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발끝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칼날 위에 선 듯했다. 난치병과 정신병 사이를 몇 번 오간 후, 나는 복합부위 통증증후군(CRPS)*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CRPS(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외상 후 특정 부위에 발생하는 드물지만,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신경병성 통증이다. 칼에 베이거나, 송곳으로 찌르거나 긁어내리는, 불에 타는 듯한 극한의 고통을 느낀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척수신경자극기, 척수강 내 약물 주입기와 같은 시술로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병이 완치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알지 모르겠다. 6년 만에 방송에 복귀한 배우 신동욱이 앓고 있다고 고백한 병. 찬 바람이 무서워 가죽 장갑으로 손끝까지 꽁꽁 싸매고, 고통을 참아 내느라 이까지 부러졌다는,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이상한 병.


예고 없이 한순간 찾아왔다. 10년 전 그날, 나는 교회를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탔다. 그 후의 기억은 없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뜬 내게 누군가 말했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그대로 보조석을 덮쳤다고.

구사일생이었다. 허리와 무릎 십자인대 손상은 천천히 회복하면 될 일이었다. 23살, 젊디젊은 몸 아니던가. 그런데 사고 5개월 후,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됐다. 어떤 날은 불구덩이에서 산 채로 온몸이 타 들어 갔고, 어떤 날은 믹서기에 온몸이 갈리는 듯했다. 마약성 진통제와 모르핀, 케타민 없이는 단 1초도 버틸 수 없었다.

그것이 내 ‘감옥’ 생활의 시작이었다. 약물 부작용으로 체중이 40kg 불어났다. 24시간 침대에 누워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만날 수 없었다. 나의 말은 바깥 세계와 통하지 않는 작은 방을 맴돌았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80알의 수면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손목도 그었다. 그렇게 다섯 번, 나는 커터 칼로 깊숙한 곳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몸을 버리고 싶었다. 그때마다 살아났고, 나는 10년을 더 누워 있었다.

감옥을 탈출시켜 준 한 줄기 빛은 복부에 이식할 수 있는 약물 펌프였다. 2015년 펌프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통증을 느낄 때면 약물이 척수로 바로 전달됐다. 극소량만으로 통증이 크게 완화되면서 나는 물컵을 잡았고, 혼자 옷을 입었으며, 침대에서 나와 걸을 수 있게 됐다.


줄어든 나의 통증과는 반대로 아버지의 짐은 늘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왜 수술을 하자고 우겨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드냐”


수술비는 1억 원.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의료비 부담이 낮다고 해도 크고 작은 수술비는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빚더미에 오르는 건 모두가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나는 10년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못난 아들이었지 않나. 돈을 벌어야 했다.


편의점으로 갔다. 나의 불완전한 몸을 내치지 않은 유일한 곳. 새벽 근무를 마다하며 110만 원을 손에 쥔 그날, 나는 기초생활수급 자격에서 탈락했다. 이후 내가 번 돈의 절반은 의료비로 고스란히 나갔다. 차라리 집에 틀어박혀 나랏돈을 받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다. 돈을 더 벌어야 했다. 남들처럼 최저시급만이라도 받고 싶었다.


여러 차례 면접을 봤다. 매번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 취업 사기도 여러 번 당했다. 어느 날, 면접장에 들어서자마자 면접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앉으실 필요 없이 그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같이 면접을 본 두 명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무사히 정규직으로 입사한 한 회사에서는 출근 하루 만에 해고 통지를 받았다. 모두가 나의 무서운 병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나는 비정상적인, 누구에게도 설명 못 할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찰나의 순간 온몸이 타올랐던 그 날처럼 나는 오늘도 한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


“죽고 싶었던 순간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을 해도, 안 해도 문제예요. 그래도 10년간 이 악물고 열심히 버텼는데… 몸의 고통이 사라진 지금이 전 더 고통스러워요.”

국가는 나를 '장애인'이 아니라 했고,


사회는 나를 '장애인'이라 불렀다


CRPS 환자들(국내 2만 명 추산)은 신체적 고통과 경제적 고통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장애’로 인정받아 조금이라도 의료비 부담을 덜기를 원한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장애 등급표상, CRPS는 통증을 느낄 뿐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비장애인으로 분류된다. ‘통증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의학계의 통일된 판정 기준이 없다’는 이유다. 게다가 사실상 완치가 불가능한 난치병이기에 약물 펌프나 척수 자극기 등을 몸에 이식해 고통을 줄였다고 해도, 의료비 부담에서는 평생 자유로울 수 없다.


치료비를 벌고자 일을 시작하면 기초수급자 지원이 끊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례로 등장한 김정훈(33, 가명)씨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의료비 부담이 오히려 커졌다고 말한다. 수입이 발생하면서 기초수급자로서 받을 수 있는 의료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버는 110만 원 가량의 수입 중 3분의 1은 의료비로 지출했다. 기초수급자일 때보다 두 배 더 많은 금액이다. 그러다 보니 약물 펌프 이식 수술로 발생한 5천만 원의 빚을 갚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지원이 필요할 땐 ‘장애인’이 될 수 없고, 홀로서기를 시작하면 사회로부터 ‘장애인’ 취급을 받는다. 김정훈씨가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자전거를 타는 평범한 일상을 얻기 위해 10년간 투쟁하듯 산 것처럼, 그는 다시 싸워야 한다. 장애 등급 판정에 대한 정부의 단순한 시각도, 난치병 환자에 대한 무지와 낮은 이해도 그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벽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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