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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나치 부역자에게 자살도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프랑스의 경이로운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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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재판정에 선 비시정부 총리 피에르 라발.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10월 15일,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남부 프랑스를 통치(1940~1944)한 괴뢰정권 비시 정부(Vichy France)의 총리 피에르 라발(Pierre Laval, 1883~1945)이 국가반역죄로 총살됐다. 비시 정부의 국가수반 페탱(Pétain, 1856~1951)에 대한 사형 선고와 함께 나치 협력자 숙청의 하이라이트였다.

비시체제 이인자, 반역죄로 총살되다

1940년 페탱에 전권을 위임하는 상·하원의원 투표를 성사시킴으로써 비시 체제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고 그해 12월까지는 부총리를 역임했던 라발은 비시 체제의 이인자였다. 라발은 페탱보다 대독 협력을 더 빨리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인물이었다.

▲독일 강점기의 프랑스(1940~1944)

출처ⓒ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1940년, 라발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페탱에 의해 체포되어 비시로 압송된 뒤 독일의 개입으로 석방됐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은 이후 그가 악명 높은 부역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나는 이제야 어디에서 나의 친구들을 찾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독일이다.”

1942년에 내각에 복귀한 뒤 라발은 히틀러의 신임을 얻으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노쇠한 페탱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다. 1942년 그가 총리에 오르면서 비시 정부는 완전히 나치 체제로 변질됐다. 라발은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를 공공연히 선전했다.

“현재 유럽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유럽이라는 말은 아직까지도 그리 익숙지 않은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인으로서 저는 장차 우리가 유럽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며 프랑스는 이런 유럽 내에서 자신에게 합당한 지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서 독일은 거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독일은 다른 국가들과 함께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자국의 젊은이들의 피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독일은 공장과 농촌에서 청년들을 끌어모아 전장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독일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독일이 승리하지 않는다면 곧 도처에서 볼셰비즘이 뿌리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피에르 라발 총리, 대독 협력을 촉구하는 라디오 연설(1942. 6. 22) 중에서

부역자 라발, 의무노동제와 프랑스 민병대 창설

그는 1942년 9월, 독일에 프랑스 젊은이들을 강제로 보내는 의무노동제를 도입했다. 만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노동제에 따라 1944년 7월까지 65만 명의 프랑스 노동자가 독일의 공장으로 끌려가야 했다.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비시정부 준군사조직 프랑스 민병대

1943년 1월엔 레지스탕스 탄압을 목적으로 프랑스 민병대를 창설했다. 준군사조직 프랑스 민병대(총수 다르낭)는 독일군, 게슈타포와 함께 나치독일의 적인 레지스탕스와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을 체포, 처벌 제거하는 등 악명 높은 대독 협력을 수행했다.


1944년 프랑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자 라발은 독일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동쪽으로 달아났다. 1945년 독일 항복 뒤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떠돌다 8월 말 미군에 항복했다. 프랑스로 송환된 라발은 최고재판소에 반역죄로 기소됐다.


라발에게 어떠한 처벌이 적합하냐는 여론조사에서 파리 주민 응답자의 65%가 사형이라고 응답할 정도로 그는 악명 높은 부역자였다. 게다가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에 비해 라발은 변론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없었다.


문단에서의 숙청에 대한 찬반 여론도 비등했다. 카뮈는 용서와 관용보다는 가차 없는 처벌을 강력한 어조로 주장했고 모리아크는 숙청과정을 주시하면서 획일화된 여론과 그로 인한 독단, 오류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누가 감히 여기서 용서에 대해 말하겠는가? 마침내 정신이 칼은 칼로써만 이길 수 있음을 깨달았고 그 자신 무기를 들고 승리를 획득했는데, 누가 그에게 망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내일 목청을 높일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를 둔 정의 자체이다.

우리들 가운데서, 결코 배신한 적이 없었던 마음속에 지고의 평화를 간직한 채 말없이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용서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영원하고도 성스러운 정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서 가장 용감했지만 사람들에 의해 영혼이 타락되어 비겁자로 전락한 자들, 가슴속에 영원히 타인에 대한 증오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을 간직한 채 절망 속에서 죽어간 자들 때문에 가혹하게 단죄하는 것 역시 그러한 정의이다.”

- 카뮈, “경멸의 시대”(<콩바>지, 1944. 8. 30) 중에서

“내가 그의 생각을 곡해할까 염려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한 나라의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점에서 이 영혼의 구원이 “아직 살아 있는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을” 희생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일까?

이런! <콩바>지의 젊은 지도자들에게는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기독교의 편린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나마의 어휘라도 간직하고 있으니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고, 또 나는 그 점에 대해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내가 익숙하게 듣던 이 신학 용어가 그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내가 파악하기 힘든 것이다. 우리가 토론할 수 없고 또한 프랑스의 살아있는 부분을 파괴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그 법은 과연 무엇인가? 내 논쟁 상대께서는 이 점에 대해 부디 깨우쳐 주길 바란다.”

- 모리아크, “<콩바>지에 대한 답변”(<르 피가로>지, 1944. 10. 22~23) 중에서

10월 5일부터 시작된 라발의 재판은 불행하게도 그 자신 못지않은 악명 높은 재판이 되었다. 예심은 급속히 처리됐고, 이에 라발의 변호인단은 재판부가 10월 선거 전에 재판을 서둘러 끝내려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공판 첫날부터 참석을 거부했다.


둘째 날 변호인단이 잠시 참석하기는 했지만 셋째 날에는 라발의 거침없는 태도에 분노한 일부 배심원들이 ‘개새끼!’ ‘배때기에 열두 발을 쏴 버리자!’라고 외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지막 이틀간의 재판은 라발이 자진 퇴정하면서 피고도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 프랑스 민병대 총수 다르낭. 그는 라발이 처형되기 닷새 전에 총살되었다.

10월 9일 재판부는 예상대로 사형을 선고했고, 라발은 10월 15일 처형 직전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결국 위세척 과정을 거친 뒤에 처형대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본인이 창설한 프랑스 민병대 총수였던 조제프 다르낭이 총살된 지 닷새 후였다.

부역 단죄, 음독자살 기도했지만 처형 집행

라발과 같은 운명을 맞이한 비시 정부 요인은 극소수였다. 최고재판소가 다루게 되어 있는 비시 정부 요인은 모두 108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라발을 제외하고 처형된 자는 민병대 총수를 지냈고 질서유지부 총서기였던 다르낭과 점령지역 비시 정부 파견대표였던 브리농 둘뿐이었다.


비시 정부의 핵심 지도자인 국가수반 페탱은 라발이 처형된 지 6년 후인 1951년 7월 23일, 대서양 되섬(Ile d'Eu)의 요새감옥 독방에서 죽었다. 4년여에 걸친 비시 정부의 통치 기간에 이루어졌던 부역에 대한 단죄는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고 3만8000명이 유무기 징역·금고형을 받았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1980년대 이후에도 '반인륜범죄'에 대한 단죄라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부역자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6천여 명 가운데 합법적으로는 약 1500명이 처형되고 5만여 명이 공민권 박탈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1983년 바르비 재판, 1994년 투비에 재판, 1997년 파퐁 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어떤 이는 거기서 불충분을 읽고 또 어떤 이는 거기서 부정적 결과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4년의 점령기가 아니라 35년의 식민지를 겪었으면서도 그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에게 프랑스의 그것은 경이로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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