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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불난 집에 뛰어들어 애타게 찾은 건 '사진'이었다

조회수 2020. 4. 18. 15: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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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 집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나올 건가요?"

휴가를 나왔다. 대부분 휴가가 그렇듯 막상 나오면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TV 앞에 앉아 멍하니 채널을 돌리면서 늦은 아침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능 프로 출연자들이 서울 방방곡곡을 누비며 인증샷을 찍는 미션 중이었다. 출연자들이 사진을 찍은 곳은 각자의 부모님이 수십 년 전에 사진을 찍은 곳이었다.


온 집안을 뒤져 옛 앨범을 찾았다. 설렘을 안고 표지를 넘기자 끼어있던 필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진 한쪽 귀퉁이에 박힌 노란 디지털 숫자들을 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것이었다. 어색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한껏 앳된 모습의 부모님. 나에게는 어색하고 신기한 사진이지만, 부모님에게는 소중한 사진일 것이다.

출처: ⓒ김상현

신입 교육을 받던 때가 기억났다. 새내기인 나는 잡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몇 안 되었다. 직원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실제로 구급차를 타기까지는 보름이 걸렸다. 화재 출동 시에는 구급차가 아닌 물탱크차에 타서 소방호스를 펴고 접는 심부름을 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침 종이 울리면 가장 먼저 일어나 소방서 차고 앞마당을 쓸었다. 그때는 한겨울이었던 터라 아침 7시에도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정리하고 들어올 즈음 출동 벨이 울렸다. 주택 화재 신고였다. 나는 어김없이 물탱크차 조수석에 앉아 화재 현장으로 향했다. 


내 몸은 오들오들 떨렸지만, 부상자 없이 안전하길 바라며 모자를 고쳐 썼다. 핸들을 잡고 있던 선배는 벌써부터 인상을 썼다. 새벽부터 누가 또 불장난을 했느냐느니, 물탱크차는 안 나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반응했다. 선배는 현장 도착하면 안전에 주의하라며 꾸중 아닌 꾸중을 했다. 그는 말이 거칠지만, 소방서에서 가장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기온 탓인지, 아직 덜 마른 탓인지 장갑은 차가웠다. 호스를 연결하며 찬 물에 젖을 생각을 하니 벌써 한기가 느껴졌다.

출처: ⓒ김상현

현장에 도착하니 날리는 재와 눈이 서로 엉겨 흩날렸다. 선배의 말이 맞았다. 불길이 보여서 신속하게 진화해야 했지만, 물탱크차까지 올 정도의 큰불은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니 MT에 가서나 맡을 수 있는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택화재 출동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인명 구조이다. 구조대의 주도로 탐색을 시작했고, 다른 진압요원은 지휘관의 전술에 따랐다.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려고 거실부터 시작해 불이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는 보일러실까지 순차적으로 공략했다. 천장을 부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펌프차에 파쇄기를 가지러 갔다. 


그사이 구조대원이 할아버지 한 분을 구조했다. 할아버지는 연발 기침을 해댔다. 코털과 눈썹이 검게 그을린 것을 보니 연기를 많이 흡입한 것 같았다. 준비된 간이 산소통에 연결해 비재호흡 마스크(non-rebreathing mak)를 씌워줬다. 산소포화도가 아직 정상 범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기에 노출된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아 보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연기를 흡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폭발 현장이거나 문을 벌컥 연 진압대원이 아닌 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린 할아버지는 구급대원의 처치에는 관심 없다는 듯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그러곤 활활 타오르는 집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다. 할아버지를 겨우 진정시킨 후, 더 구조할 사람이 있냐고 묻자, 아무도 없단다. 할아버지는 “사진을 가지고 오라”며 소리쳤다. 이제야 환자의 상태가 이해됐다. 할아버지는 사진 때문에 사고 현장으로 다시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처럼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집에 불나면 어떤 물건을 가져오고 싶냐?”

통장을 가져온다는 사람도 있고, 반지를 가져온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라면? 아마 일기장을 챙길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 불이 난다면 어떤 작품을 가지고 나오겠냐는 우문에, 프랑스 작가 베르네는 출구에 가장 가까운 작품을 택하겠다는 현답을 내놓았다. 그만큼 화재현장에 다시 들어가는 행동은 무모하다. 그것을 직접 행한 환자를 마주하고 있음에 놀라웠다.

출처: ⓒ연합뉴스

앨범은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열었던 문 너머 책장에서 발견됐다. 예상했던 대로 앨범은 녹아서 떼어내기 힘들 정도로 페이지가 모두 붙어버렸고,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쯤 되니 사진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사진이길래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검게 탄 사진을 보고도 행복해하는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앨범을 함께 구경했다. 아들뻘로 보이는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자식 사랑에 이길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드님이 참 잘생겼네요.”

할아버지가 답했다.

“나야.”

사람들은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다르다.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명예를 좇는다. 무엇을 좇느냐에 따라 사는 방향과 모습이 달라진다. 반면 누구든지 소중히 여기는 가치도 있다. 나는 젊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땐 그랬지”하며 나이 든 부모님들이 회상하는 과거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벅차서 멈춰 서고 싶은 젊은 나의 현재도,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학생들의 미래도,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킨다.


나는 휴가 마지막 날, 스캔한 앨범 사진을 부모님에게 보냈다. 요즘엔 이런 것도 되냐며 기뻐했다. 앨범 속에 넣어둬도 색 바랠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고마워했다. 그 사진은 며칠 후 부모님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됐다.

출처: ⓒ김상현

* 외부 필진 김상현 님의 기고 글입니다.


** 2018년 5월 25일 직썰 글을 재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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