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차지했던 국유지를 개인 소유로 가로챈 사람들

조회수 2020. 4. 16.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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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지 찾기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토지조사사업 중인 일본인들

근 20년도 지난, 90년대 중반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경남 지역 한 지방법원의 판사 명의로 된 편지가 한 통 배달됐다. 법원에서 온 편지여서 처음엔 가슴이 덜컹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싶었다.


편지를 뜯어보니 내게 자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맡은 사건이 무슨 땅 소송사건인데 땅 주인의 이름이 일본식 이름으로 돼 있다고 했다. 원소유자가 일본인인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한 한국인인지도 불분명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땅이 해방 후에 제3자에게 양도가 된 상태여서 일이 더욱더 꼬이게 된 것 같았다.

옛 토지대장(자료사진)

그 판사가 일면식도 없는 내게 자문을 요청한 것은 1994년에 내가 <창씨개명>이라는 책을 펴낸 것을 본 모양이었다. 당시만 해도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는 이 책 말고는 참조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에 창씨개명 관련 박사 논문이 두 편 나왔다.) 


내 답변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일본식 이름으로 된 원소유자 명의 토지문서의 연도, 그리고 일본식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선 연도가 중요한 것은 조선에서 창씨개명이 실시된 것은 1940년 2월 11일부터였다. 이날은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이 되는 날로 우리로 치면 개천절 2600주년에 해당한다. 일제는 이 ‘성스러운 날’을 기념해 조선인들에게도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특별히 ‘은혜’를 베푸노라고 선전해댔다. 그러니 이날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일본식 이름을 썼다면 그건 일본인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 이전에도 비공식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극렬 친일파가 한 둘 있었다.)

필자가 펴낸 <창씨개명>(학민사, 1994)

두 번째는 이름이 어떤 식으로 돼 있느냐는 점이었다. 일제의 강요로 불가피하게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조선인들은 자신의 뿌리를 남겨두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춘원 이광수(香山光郞)처럼 완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개 문중에서 창씨를 할 씨(氏)를 결정하면 대다수는 이에 따랐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하동(河東) 정씨인데 우리 문중에서는 ‘하동(河東)○○’로 창씨개명을 했다. 또 조선조 왕족인 전주(全州) 이씨의 경우 ‘국본(國本)○○’로 하기도 했다. 물론, 문중에서 결정한 씨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창씨한 사람도 없진 않았다. 따라서 이름만 봐도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를 상당수 가려낼 수 있었다.

[비즈 칼럼] 국유지 되찾기, 또 하나의 역사바로잡기 (중앙일보, 2014.08.19.)

오늘 우연히 인터넷에서 위 기고문을 접하고서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요즘도 일제강점기 당시의 땅을 놓고 소송사건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는 국유지를 불법적으로 명의를 이전해 가로챈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나 동양척식회사 명의로 있던 땅은 이른바 적산(敵産)인 셈인데, 해방 후 무주공산으로 여겨져 이런 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산림청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민들이 함께 나서서 ‘국유지 찾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

* 외부 필진 정운현 님의 기고 글입니다.


** 2018년 4월 10일 직썰 글을 재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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