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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대신 조선 땅에 묻힌 이유

관동대지진 후 부부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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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 27일 글을 재발행합니다.

▲ 1923년 10월 24일, 박열과 가네코는 대역죄로 기소됐다. 사진은 공판이 열리던 재판정의 모습

1926년 3월 25일 일본의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기소된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과 그의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결심 공판이 열렸다.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 200여 명과 헌병 30명이 법정 출입자를 삼엄하게 검문하는 등 법원 안팎을 통제하고 있었다.

박열-가네코 부부,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다

재판장은 선고 전에 일어설 것은 명했지만, 피고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판장은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이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후미코는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고 박열도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이 덧붙였다.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두 사람이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발생 이틀 후인 9월 3일이었다. 정오 무렵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동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화재로 불타오르는 상황에서 조선인을 겨냥한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독약을 사용하여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조선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다. 이는 대지진의 공포를 조선인과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등에 대한 증오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였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6살짜리 조카,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이자 오스기의 아내인 이토 노에가 살해된 것도 이때였다.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헌병들은 이들을 체포한 뒤 죽을 때까지 구타한 뒤, 그 시신을 우물에다 유기했다.


이어서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재일 조선인들이 학살됐다. 자경단에 학살당한 상당수의 희생자는 암매장됐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하천 스미다가와와 아라카와가 떠내려오는 시체 때문에 피로 물들었을 정도였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9월 3일부터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물론 정태성, 장상중, 최규종, 홍진유 등 지난 4월 조직한 비밀결사 불령사 회원들이 일제히 체포됐다. 


다음 달인 4월 24일 일제는 두 사람을 대역죄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일본 경찰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졌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를 천황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했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만남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 사람이다. 함창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했다. 3학년 때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 다녔다. 이듬해에는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 등과 교유했고 재 동경 조선인 학생들과 ‘의거단’을 결성했다.


1921년 4월 경성에서 이강하 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로회를 조직했다. 11월에는 김약수, 조봉암, 서상일, 황석우 등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동경 흑도회를 창립했다. 


1920년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자아의 해방과 민중의 직접행동에 따라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테러활동으로 저항했고, 상호부조론과 자유연합주의로 지배와 권력이 없는 신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독자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박열은 운명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난다. 가네코는 후세 다쓰지(1880~1953)와 함께 이 시기 한인 아나키스트와 연대한 대표적 반전활동가였다. 19살 때 도쿄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접한 가네코는 박열을 만나 비밀결사 ‘불령사’를 결성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했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일본민중을 억압하면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반대해 조선민족과의 공동투쟁을 선언했다. 그녀는 청년조선 잡지 교정 중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동했고 5월부터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옥중의 부부. 이 사진으로 판사는 사직했고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박열은 가네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창간했다. 이후 그는 니가타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 살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항의투쟁을 벌였다. 시노가와 댐 공사 조선인 학살사건 현장조사 등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시기에 보호 검속의 명목으로 체포됐던 박열 부부가 대역죄로 기소된 것은 뜻밖이었다. 두 사람이 천황과 황태자에 대한 폭탄투척을 계획한 것은 사실이었다. 박열은 1923년 11월로 예정됐던 왕세자 히로히토의 결혼식을 염두에 두고 수차에 걸쳐 여러 경로로 폭탄을 구입하기 위해 애썼지만 모두 실패했던 것이다.

(1) 1921년 12월 외항선원 모리다(森田)를 통해 외국에서 폭탄을 구입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고, 약국 수백 군데에서 폭약 판매 허용치인 0.02g씩을 사 모아 폭약을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 1922년 9월, 박열은 서울에서 의열단과 관계있는 김한을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했다.

(3) 1923년 1월, 김한이 의열단원 김상옥의 서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돼 체포되자 박열은 김중한에게 폭탄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하고 이를 철회했다.

물적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일경의 신문 과정에서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고 했음을 당당히 밝혔다. 특히 그는 예심 법정에서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해 관철했다. 일본 사법부로선 치욕적 요구인데도 재판부는 ‘우등국가’를 과시하고 피고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1) 나는 피고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조선주권을 강탈한 일본대표와 담판하는 위치에 있다.

(2) 좌석은 재판장과 대등한 높이의 좌석으로 한다.

(3) 나는 조선 예복으로 정장하고 조선 국어를 사용한다.

(4) 재판 전에는 조선민족 대표로서 선언문을 낭독한다.

옥중에서 부부가 되다

▲ 수감 중의 박열

이후 박열은 사모관대에 조선 관리의 예복인 조복을 차려입고 사선까지 들고, 가네코는 흰 저고리, 검은 치마 차림에 머리까지 조선식으로 쪽진 모습으로 재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이틀 앞둔 3월 23일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합법적인 부부가 됐다.


후미코는 재판정에서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박열 부부의 의거를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1925년 11월 25일). 검찰의 사형 구형을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열흘 후인 4월 5일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됐다. 박열은 이치가야형무소로, 가네코는 도치기현 우쓰노미야형무소로 이감됐다. 뒷날 두 사람이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일본에 큰 여파를 일으켜 사진 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사퇴하고 와카쓰키 내각이 무너지기도 했다.

▲ 고작 스물세 살에 삶을 마감한 여성혁명가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의 조국 땅에 홀로 잠들어 있다.

가네코는 일본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항해 법정투쟁을 전개했고,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갇힌 후에도 전향공작을 뿌리치고 비전향을 관철하다가 1926년 7월 23일 복역 중이던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형무소 측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부부의 변호를 맡았던 아나키스트 동지 후세 다쓰지(1880~1953) 변호사와 원심창 등 흑우회원들의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해 ‘타살 의혹’이 짙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가네코는 죽고 박열은 22년 2개월 복역

박열의 변호인으로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했고 선고 공판을 앞두고 두 사람의 옥중 결혼 수속도 밟아 주었던 다쓰지 변호사는 그의 유골을 수습했다. 박열은 형에게 부탁해 가네코의 유골을 고향 선산에 안장했다.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가네코는 남편의 고향인 주흘산 자락 팔영리 중턱에 묻혔다.

▲ 1945년 10월 27일 박열 출옥 환영대회가 열린 오오다테역 광장. 1만5천 명이 운집했다고.

1945년 해방이 되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속속 감옥에서 풀려나왔지만 박열은 곧바로 석방되지 않았다. 동포들이 여러 차례 석방을 청원하는 시위와 탄원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박열은 아키타 형무소에서 석방됐다. 1945년 10월 27일, 22년 2개월 만이었다.


박열은 1946년 2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세 분의 유해를 발굴, 무사히 본국으로 보냈다. 같은 해 10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고 단장이 돼 1949년 5월 영구 귀국할 때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 한국전쟁 중 납북된 박열은 북한에서 1974년에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기념공원의 박열 추모비

▲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 2012년 개관한 박열의사기념관

▲ 박열의사기념공원 입구에 복원해 놓은 박열 의사의 생가. 경북 기념물 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박열은 서울에서 납북됐다. 대부분의 납북 인사들이 북한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1974년 1월 17일 북한 당국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박열의 죽음을 알렸다.


1989년 정부는 박열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제85호)을 추서했다. 2001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된 뒤 조성되기 시작한 박열의사기념공원 안 산기슭에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이전됐다(2013년). 2012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 마침내 박열의사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3월 23일 오후에 찾은 박열의사기념관은 산을 등지고 꽤 큰 규모로 서 있었다. 주차장에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견학을 마친 듯 대학생들이 기념관을 막 나오고 있었다. 기념관은 잊힌 한 혁명가 내외의 삶을 시청각적으로 복원해 놓았다. 


공원 한쪽 산기슭에 있는 가네코의 무덤을 지나며 식민지 청년을 사랑했던 일본인 여성 혁명가를 생각했다. 그는 고작 스물셋으로 삶을 마감하고 남편의 조국 땅에 묻혔고 해방 조국으로 돌아온 남편은 타의에 의해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기념관 벽면에 흐르고 있는 영상 속에 새겨져 있었던 박열의 어록을 나는 잠깐 떠올린다.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 박열, “신조선혁명론”에서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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