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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김옥균은 왜 피살 후 능지처참을 당했나

1894년 오늘, 풍운아 김옥균 자객의 총탄에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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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해에서 쓰러지다

▲ 상하이 미국 조계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 이 여관의 객실에서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피살됐다.

▲ 갑신정변 전후의 김옥균. 그는 일본에서 이와타로 살았다.

1894년 3월 28일 오전 중국 상하이 미국 조계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 2층의 객실에서 울린 세 발의 총탄이 한 사나이를 쓰러뜨렸고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자주 근대화를 통해 새로운 ‘근대 조선’을 꿈꾸었던 혁명가 고균 김옥균(1851~1894)은 그렇게 그 풍운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43세. 


1884년 갑신정변으로 곤경에 처했던 민씨 척족정권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1850~?)의 총탄은 ‘근대 조선’의 길을 모색한 정객 한 명을 쓰러뜨린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봉건왕조 조선이 근대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옥균은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에 의해 근대적 개혁을 위해 형성되고 있던 개화사상을 배우고 익혔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면서부터 그는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힘써 많은 동지를 모아 지도자가 됐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메이지유신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만나 그들의 정치적 전망을 파악했다. 


김옥균은 승정원 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 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했다.

▲ 자객 홍종우

그는 일본이 근대화를 통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돼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해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것을 위해선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청나라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청나라는 3천 명의 군대로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여전히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적극적인 내정 간섭을 자행했다. 


청나라는 개화파들의 자주 근대화 정책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이해에 반한다고 여겼다. 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씨 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동조해 개화당에 대한 박해를 계속했다. 


김옥균은 임오군란 후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본국으로부터 유학생을 선발해 보내도록 했다. 이듬해(1883)에도 임금의 위임장을 지니고 세 번째로 일본으로 가 국채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이 지닌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했다. 이는 묄렌도르프(Mӧllendorff)와 민씨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결국, 김옥균은 국채 모집에 실패하고 1884년에 빈손으로 귀국했다.

▲ 갑신정변의 주역들. 이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있던 날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수립했다.

세 차례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해 그는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올바르게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개화정책을 서두를수록 청나라와 민씨 수구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화했다. 이에 그는 정변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해 나라를 구하는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고민했다.

갑신정변, 일본에 의존한 위로부터의 개혁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 때문에 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청은 조선에 주둔시킨 3천 명의 병력 가운데 반을 베트남 전선으로 옮겼다. 1884년 8월, 마침내 청불전쟁이 일어나면서 청은 연전연패했다. 김옥균은 이를 기회로 보고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마침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귀국했다가 그해 10월 서울에 귀임해 개화당에 대한 종래의 적대적 태도를 바꿔 개화당에 접근했다. 김옥균은 정변에 청군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을 막는 데 조선군 1천 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 일본군 150명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중앙사무소와 부속건물들의 당시 사진

1884년 12월 4일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개화파들은 연회를 이용해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했다. 그날 밤으로 민씨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고종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했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하에 혁신정강을 제정했다. 


6일 오전 9시께에는 고종의 전교형식을 빌려 이를 공포했다. 이날 오후 3시에는 고종도 추인해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했다. 그러나 정변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청군이 무력 개입을 시작한 것이었다.

▲ 김옥균의 필적

청군 1,500명은 이날 오후 3시부터 불법으로 궁궐을 공격해 들어왔다. 외부 호위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접전하다 이내 패퇴하자 중간 호위를 맡았던 일본군도 줄행랑을 놓아 버렸다. 청군의 무력 공격은 성공했고 정변은 실패했다. 김옥균과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것이다.


홍영식과 박영교(박영효의 형)는 고종을 북관 종묘까지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죽었다. 조선부는 정변을 역모로 규정하고 주모자들을 처형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천안 감옥에서 참살돼 효수되고 어머니는 자살, 동생은 감옥에서 죽었고 부인 유씨는 딸과 함께 옥천의 관비로 떨어졌다.

좌절된 혁명, 망명의 삶

자식들은 혁명을 벌였지만 정작 그들 부모는 유교적 봉건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들 주역의 집안 소식을 따로 전하고 있다. 홍영식의 아버지가 ‘역적 아들’을 한탄하면서 자살했고 홍영식의 아내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영효의 아버지도, 서재필의 부모도 자살했다. 서광범의 부친은 감옥에서 죽었다.


집안이 결딴났지만 김옥균과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개화파와 함께 후퇴하는 일본 군대를 따라 일본 공사관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도 망명한 그를 박해했다. 일본은 그를 1886년 8월 오가사와라 섬에 유배했다가 1888년에는 북해도로 추방하여 연금했다. 일본에게 쓸모가 없어진 김옥균은 이미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일본 체류 10년 동안 김옥균은 이와타 슈샤쿠라는 일본식 가명으로 살았다. 조선 정부의 송환 요구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1890년이 돼서야 김옥균은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경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민씨 정권이 일본에 보낸 자객 이일직의 계략에 빠져 홍종우와 함께 상해로 건너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홍종우는 이일직에게 포섭돼 망명 정객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해 살해한 것이었다.

▲ 상하이에서 죽은 김옥균의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왕명으로 능지처참 돼 효수됐다.

▲ 동경에 있는 김옥균의 묘

김옥균의 시신은 왕명에 따라 한강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돼 효수됐다. 그의 부음을 들은 일본에서는 돌연 ‘김씨우인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동경의 혼간사에서 김옥균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들은 청과 조선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뒷날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을 벌이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제거한 공로로 189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리가 됐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쳤다. 홍종우는 아관파천(1896) 이후 서구 열강 간에 세력균형이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활약한다. 그도 개화파였지만 근왕주의에 치우쳤고 황국협회의 회원으로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활동을 탄압했다. 


김옥균이 죽고 나서 4개월 뒤에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됐다. 이듬해(1895)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따라 김옥균은 사면·복권됐다. 김옥균은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

국사 교과서에서는 갑신정변을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달성하고자 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소수의 지식인이 중심이었고 정변이라는 급진적 방식을 택한 점’과 ‘일본의 군사적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점’ 등을 한계로 지적한다. 또 ‘농민의 염원이었던 토지 개혁에 소홀해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점도 결정적인 한계로 본다.

김옥균은 근대적 개혁을 주창한 사상가로 평가된다. 그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변이 실패하면서 그가 주도한 개혁은 좌절됐다. 일본을 끌어들였다거나 혹은 일본에 이용됐다는 부분도 그가 주도한 개혁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부분 때문이다. 그는 더러 “일본을 ‘이용’해 근대화를 꾀한 혁명가”와 “일본을 ‘업고’ 개화를 추구한 ‘친일 협력자’” 사이를 오간다. 갑신정변의 동지 서재필과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의 그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애국적 혁명가’로 보는 박은숙(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과 ‘희대의 사기꾼?’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김기협(박은숙의 서평)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다. 


그러나 비록 갑신정변이 일본의 군사적 지원 등 일본의 힘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친일 세력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자기 시대를 스스로 만들어가지 못한 한계 때문에 ‘혁명가’보다는 ‘풍운아’로 불리지만 그가 자주적 근대화를 통해 새로운 근대 조선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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