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의 태극기는 애국의 표상일까

조회수 2020. 3. 7.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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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3월, 태극기 조선의 정식 국기가 되다.

* 2016년 3월 5일 작성된 글입니다.

▲ 고종이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선포해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상징이 됐다.

국기법으로 규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국기는 그 나라의 대(내)외적 상징이다. 성조기(미국)나 일장기(일본), 오성홍기(중국), 삼색기(프랑스) 따위는 그것 자체만으로 그 나라의 정체성과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1883년 3월 6일, 조선 정식 국기 선포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바로 배우게 되는 7·5조의 동요 ‘태극기’를 통해 우리는 태극기로 상징되는 국가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운동회 날에 온 교정을 가득 채운 만국기의 행렬 속에서 유독 태극기의 존재를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3월 6일은 1883년 고종이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선포한 날이다. 그로부터 137년이 흘렀다. 국기의 모습은 얼마간 바뀌긴 했지만,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대내외적 상징으로서 그 소임을 훌륭히 수행해 왔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때와 박영효를 비롯한 일본 수신사 일행이 내걸었던 깃발과 오늘날 국제 외교 무대에 걸리는 태극기의 위상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 국기를 ‘태극기’라 함은 흰 바탕에 빨강과 파랑의 태극문양을 쓰기 때문이다. 이 문양을 가운데 두고 네 귀에는 검정 건곤감리 4괘가 놓인다. 건곤감리는 <주역>의 기본 괘로 하늘(건)과 땅(곤), 물(감)과 불(리)을 상징한다.


태극기를 처음 도안한 이는 고종이라고 한다.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해 제작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조화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국기를 만들게 한 것이다.

청·홍·백의 조화 = 군민일체 사상

이 삼색의 조화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일본제국의 국기와 다소 비슷하다 하여, 김홍집은 “반홍 반청의 태극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해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것은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하면서 4개의 발을 가진 용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서 동쪽을 뜻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용의 발을 적게 표현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마건충이 말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1882년 5월 조약을 체결할 때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돼 갈 때도 일본증기선 메이지마루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됐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됐다. 4년 뒤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기존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쓰기로 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면서 국기도 사라졌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면서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다시 떠올랐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쓰다가 1942년부터 공식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해방 조선의 국기는 당연히 태극기였다. 미군정 시기는 물론 소련 군정 하의 북한 지역에서도 조선 국기로 태극기를 사용했다.

분단으로 나뉜 깃발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그때까지 내내 사용하던 태극기를 인공기(홍람오각별기)로 교체했다. 남한에서는 나흘 후인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됐다.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진 것은 1949년 10월 15일에 문교부 고시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였다.

▲ 남북한에서 국기를 제정한 것은 1948년 7월 8일(북한)과 12일(남한)이었다. 인공기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왔다. 두 기는 비례가 다르다.

이후 1984년에는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됐고, 2007년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됨으로써 이들 규정과 법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국기법으로 국기를 규정하는 나라는 남북한, 일본 등이다.

국기가 애국의 표상인가

▲ 서울 수복(1950.9.28.) 때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이후 태극기의 위상은 새로워졌다(!). 그것은 의전에서의 국가를 상징하는 구실을 넘어 이 나라 보수 세력이 오매불망 추구하는 ‘애국’과 등치됐다. 무싯날이라도 곳곳에서 태극기의 물결이 넘실대는 까닭이 거기 있다.


동요에서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이고,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어린이들의 가슴에 심어준 것과 주야장천, 사시사철 태극기로 나라 안을 도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1월에는 광화문 광장에 대형 태극기를 상시게양하는 문제로 서울시와 보훈처가 갈등을 빚었다.


이제는 삼일절 등이 아니어도 거리 곳곳에서 태극기가 펄럭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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