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 침략의 첫 단계가 된 '그때 그 사건'

조회수 2020. 2. 29.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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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 체결되다.
▲ 강화도 연무당에서 체결된 병자수호조규 체결 모습을 그린 삽화(1876.02.27.)

1876년 2월 27일, 강화산성 연무당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판중추부사 신헌(1811~1884)과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1840~1900, 2대 내각 총리대신)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흔히들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규 등으로 불리는 이 통상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프랑스(병인양요, 1866)와 미국(신미양요, 1871)의 통상요구를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통상 수교 거부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강요하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이른바 ‘쇄국정책’이었다.

은둔의 나라를 찾은 ‘제국주의’

그러나 이러한 대외정책은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 체제가 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정권을 주도하게 된 민씨 세력은 대원군의 정책을 부정하고, 청나라와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에도 유화 정책을 펼쳐 나갔다. 또 이 시기에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 실학파들의 주장인 부국강병을 위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통상 개국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제기되면서 ‘조선 침략’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고 있었다.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출몰케 해 초지진 수비병의 발포를 유도했다. 이에 수비대가 경고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포격으로 대응하며 군대를 상륙 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35명이 전사하고 대포와 총기, 군기 등을 약탈당했지만,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를 내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압도적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운요호 사건’이다. 


조선 정부는 접견대관에 신헌, 부대관에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을 임명해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운현궁으로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은 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여론의 반대도 높았다. 일제의 야욕을 내다본 최익현(1833~1906)은 조약 체결 직전인 1876년 1월 말, 도끼를 들고 궐 앞에 엎드려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 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건립한 척화비. 1871 년, 경북 군위
▲ 강화도 초지진. 운요호 사건 때 일본은 이 진지에 접근하여 조선군 수비병의 발포를 유도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이 욕심 내는 것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대부분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기이한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어서 한정이 없습니다. 반면 우리의 물화는 대부분 백성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 땅에서 생산되어 한정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스럽고 기이하며 마음을 좀먹고 풍속을 해치는 물화와 교환한다면, 해마다 그 양이 수만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동토(東土) 수천 리에 전답은 황폐해지고 집은 다 쓰러져 다시 보존하지 못하게 되고, 나라도 반드시 뒤따라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둘째 이유입니다.”

- 최익현, 도끼를 들고 궐 앞에 엎드려 척화를 논하는 상소(고종 13, 1876)

이에 동조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졌지만, 고종은 강경히 이들의 소를 물리쳤다. 조선과 일본의 충돌을 우려한 청나라가 조약 체결을 권유하기에 이르자, 결국 강화도에서 일본과 공식 회담이 열렸다. 국내의 척화론보다 일본의 무력시위가 강력히 작용한 데다가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이어서 결국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었다.

출처: ⓒ오마이뉴스
▲ 강화도조약이 이뤄진 연무당 옛터 표지. 뒤에 강화산성 서문이 보인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었다. 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을 차례로 개항했고, 이로 인해 발달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요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최초의 불평등 근대조약으로 문호를 열다

일본은 조약의 제1조에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주국임을 선언했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조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은 일본의 자유로운 연해 측정과 치외법권을 허용했고, 조계지의 설정과 일본 화폐의 유통,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1853년 포함외교에 굴복해 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굴복해 이듬해 미일화친조약(1854)을 맺었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면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첫 번째 먹이인 조선에 미국이 행사한 포함외교의 공식을 재연했다. 결국,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첫 단계를 실현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부록 및 후속 조약이 체결됐으며,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에 따라 체결된 불평등조약은 이후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조일수호조규 부록(1876.08.24.), 조일무역규칙(1876.08.24.), 조일수호조규 속약(1882.08.30.)이 잇달아 체결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강화해 간 것이었다. 


141년 전의 까마득한 과거사지만 이 강제 개항은 불과 34년 후의 경술국치,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서구 열강에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음산한 기운은 마침내 은둔의 나라 조선에 당도한 것이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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