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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세우자고 역사를 부수는 나라

조회수 2020. 2. 10. 15: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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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가 파묻어버린 유적들에 관한 이야기다.

* 2016년 6우러 16일 직썰에 게재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아득한 옛날 아프리카에서 어느 유인원이 두 발로 딛고 선 이래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와 멸종, 새로운 종의 탄생을 거듭하면서 지구상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그들의 화석과 유적은 인류의 이동과 당시의 생활상을 수십만 년 후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를테면 70만 년쯤 전에 살았던 베이징 원인은 불을 피울 줄 알았고, 석기를 다듬어 사용했다. 그럼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물론 수십만 년 전의 땅과 바다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오늘날의 지도를 갖다 대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만 우리나라에도 원시인이 있었다.


1932년 함경북도 동관진이라는 곳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됐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보다 오래된 구석기 유적이 한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인 1963년에는 북한에서 또 다른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다(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이듬해 1964년 4월에는 남한의 충청남도 공주에서 매우 중대한 구석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고고학 전공 대학원생이던 미국인 앨버트 모어 부부가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뗀석기(자연석에 물리적 타격을 가해서 만든, 구석기 유물) 일부를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 일대에서 본격적인 발굴이 추진되었는데, 약 30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 유물부터 중기·후기 구석기 시대는 물론 청동기 시대의 유물까지 나왔다. 이 발굴팀의 조교로 활약하던 이융조는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근무하게 되는데 1982년 겨울 뜻밖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청원군(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일대의 석회석 광산 현장소장인 김흥수라는 분이었다. 이융조 교수는 김흥수씨와 안면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씨가 석회석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추다가 옛 짐승 뼈 같은 것이 나오면 이 교수에게 연락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이융조 교수는 김흥수씨에게 되풀이해 강조했다고 한다.

"사람 뼈가 중요합니다."

그래서일까? 전화를 건 김흥수씨의 목소리는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사람의 치아 같은 게 보입니다. 빨리 와보세요."

산세가 두루뭉술하다고 해서 두루봉이라고 불리던 산자락을 훑고 다니던 김흥수씨의 눈에 어린아이의 두개골로 보이는 사람 뼈가 포착됐다. 이융조 교수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루봉의 석회석 동굴에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구석기 시대 아이의 뼈를 발견하게 됐다.

출처: ⓒKBS

키가 110~120㎝인 4~5세가량 어린아이의 유골이 석회석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동굴 근처에서는 구석기 시대 석기들이 나왔다. 대략 4만 년 전의 유골로 추정된 이 아이는, 발견자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불리게 된다. 이융조 교수에 따르면 발굴단원들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적에 사람의 이름을 붙인 첫 사례였다고 한다.


무려 4만 년 전에 살았던 흥수아이의 자취가 얼마나 소중한지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흥수아이는 4만 년 후의 사람들에게 또 하나 큰 감동을 주었다. 아이의 몸 근처에는 꽃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4만 년 전, 뜻하지 않게 아이를 잃은 부모 또는 가족들이 아이를 반듯하게 누인 뒤 꽃을 뿌리며 슬퍼했던 것이다.


국화와 진달래 종류로 추정되는 그 꽃들은 석회암 지형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꽃들이었다. 즉 꽤 멀리 있는 꽃들을 따와서 아이의 몸을 덮었다는 뜻이다. 흥수아이는 구석기 시대 장례 풍습을 담은 고고학적 가치와 더불어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수만 년 동안 간직해온 것이었다. 상상해보라. 4만 년 전의 엄마 아빠가 슬프게도 저세상으로 간 아이 위에 눈물과 함께 꽃을 뿌리는 모습을.


그런데 혹시 현장에 가보고 싶지 않으신가? 흥수아이가 4만 년 동안 누워 있던 바위도 구경할 수 있고, 요즘 같으면 그 장례식을 그럴싸하게 재연하는 행사가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이다. 흥수아이가 4만 년 동안 안식했던 두루봉동굴은 지금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당초 ‘사람 뼈’를 찾은 김흥수씨 역시 발견 직후에 이융조 교수를 부른 건 아니었다. 사흘을 고민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이융조 교수가 그렇게 고대하던 사람 뼈가 나왔다면, 그 장소는 문화재로 지정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김씨가 관여하고 있는 석회석 광산 일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게 된다. 즉 자신에게는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뼛조각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김흥수씨는 실로 다행스러운 결심을 한다.

"주변에서 반대했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막연하게 느꼈다. 덕분에 금전적 손해는 컸지만, ‘흥수아이’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 2015년 4월13일자 <충북일보> ‘두루봉동굴 흥수아이 첫 발견자 김흥수씨’ 기사

그러나 사람들이 다 김흥수씨 같지는 않았다. 두루봉동굴은 사유지였다. 소유자인 광산주는 완강히 그 이상의 조사를 거부했다. 국가 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정부엔 이런 일에 관심을 쏟을 ‘깜냥’이 부족했다. 결국 구석기 시대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유적이자 흥수아이를 온전하게 4만 년 동안 품었던 두루봉동굴이 폭파와 채굴을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두루봉동굴은 현재 큼직한 웅덩이로 남았을 뿐이다. 이융조 교수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두루봉동굴을 보존하지 못한 것은 한스럽다. 우리가 잘했다면 한국의 주구점(周口店:글머리의 베이징 원인이 발견된 세계에서 손꼽히는 구석기 유적지)이 됐을 것이다."

몇 년 전 한 프랑스의 학자가 흥수아이의 시료, 즉 미세한 조각을 분석한 결과 흥수아이가 구석기 시대 아이가 아니라 19세기 아이의 뼈라는 황망한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 학자들은 당연히 반발하며 시료가 오염됐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스스로 흥수아이를 입증할 가장 큰 증거물을 없애버린 뒤였다. 혹여 프랑스 학자가 “발견된 곳이라도 한번 확인해보자”라며 한국을 찾았더라면 얼마나 크게 웃었을까.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얼마 전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옛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옥바라지하던 이들이 묵던 오래된 골목을 철거하니 마니 옥신각신하다가 서울시장이 직접 나서 철거를 중단시키는 소동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 당국은 하루에 단 한 명씩만 면회를 허락했고 그나마 심통 나면 면회 불가 딱지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가족들은 이 옥바라지 골목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면회를 기다렸다.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사에서 이름을 남긴 큰 어른들의 가족도 옥바라지 골목 신세를 졌다. 그곳에서 사식을 준비하거나 출소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부를 마련했다.

출처: ⓒtbs

서대문형무소가 세워진 건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군인들이 합세하면서 의병 투쟁이 한창 벌어지던 1908년. 옥바라지 골목도 근 100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만이 가진 역사의 터전이다. 그런데 이 골목을 다 갈아엎고 아파트 네 동을 짓는 ‘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사업이고 그를 통해 누군가는 돈을 벌고 산뜻한 새 아파트도 언뜻 보기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위해 또 하나의 역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지금껏 우리가 파묻은 역사가 얼마이고, 파괴해버린 과거는 또 어느 정도일까? 흥수아이가 4만 년을 보낸 동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의 자취를 헤아리다 보면, 어이가 없어서 비참해질 정도다. 흔해빠진 아파트를 위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옥바라지 골목을 없애자는 주장이 어찌 그토록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이 글은 <시사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 외부 필진 김형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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