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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항복한 피난민까지 모두 학살한 이유

칭그스칸의 전투 전술의 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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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은 유례없는 잔인함으로 유명했지만, 교활하고 정교한 전술도 유례 없이 훌륭했다.  

1220년 어느 날, 카와라즈미안(Khawarazmian)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부카라(Bukhara)의 모스크에는 새로운 정복자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모여 들었다. 작은 말에서 내려 연단에 오른 전사는 처음 보는 이방인이었고, 그의 옷과 갑옷으로 보아 아주 먼 나라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종교지도자, 의사, 학자와 귀족들은 이방인 정복자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마침내, 통역이 전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들이 엄청난 죄를 졌다는 것을 그리고 특히 지도층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다면, 신을 대신해 너희를 응징하러 온 내가 바로 그 증거다. 너희가 죄가 없었다면, 신은 나를 여기까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1227년 중서부 중국의 탄구트를 포위한 칭기즈칸의 군대를 그린 16세기 그림

정복자 자신이 마음대로 정의한 신의 분노는 부카라 시민들을 교화시키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병사들은 매우 조직적으로 도시를 약탈했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리로 나뉘어져 정복자 옆에서 함께 행진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렸고, 특히 모스크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고 왜 부카라에 나타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곧바로 그의 병사들은 인근의 도시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큰 도시들도 신의 분노를 빙자한 응징을 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정복자는 바로 칭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이었다.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동해에서 지중해 그리고 카파치안(Carpathian) 산맥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다. 백만 명이 넘는 전사를 거느린 칸은 세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고 병사들의 질과 양을 봐선 못할 것도 없었다. 결국 몽골제국도 스스로 무너져 사라졌지만,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칸은 뛰어난 장수, 전술, 무기를 가지고 세계를 정복해 나갔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영토(안타깝게도 외국 인용 자료는 모두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

몽골군의 뛰어난 전략·전술

몽골군이 사용한 전술은 스텝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술이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대규모 정규군의 작전개념으로 적용시켰다. 이렇게 진화된 전술과 전략 덕분에 방대한 지역을 마구잡이로 정복해 나가지 않고 여러 전선에 걸쳐 단계별로 확장할 수 있었다. 전쟁기술이 점차 조직화되면서 몽골군도 부족전사에서 정규군으로 진화한다.


다른 스텝전사들과 같이, 몽골군은 원래 경장궁기병이었다. 즉 그들의 전술은 개별 전사의 뛰어난 활 솜씨와 기동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적의 사거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히트앤드런 방식으로 화살을 퍼붓는다. 십자군이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투르쿠군에서 당한 것처럼 몽골군은 화살 사거리 안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적의 대열이 무너져서 치명타를 가할 때에만 근접전을 펼쳤다. 적 앞에서 후퇴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그 유명한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 적을 유인하면서 등을 돌려 화살을 쏘는)을 구사했다. 적을 충분히 유인해서 대열이 길게 늘어졌을 때에는, 그들을 포위해 전멸시켰다. 이런 전투방식은 기습, 매복, 포위전술을 곁들일 때 효과적이며, 적이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확실하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몽골군이 가장 즐겨 활용한 전술, 화살세례

그들은 적을 포위한 후에 마치 메뚜기 떼가 하늘을 덮는 듯한 엄청난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세례 공격을 하는 거리는 경우에 따라 다른데, 200~250미터에서 쏘는 화살은 적의 대열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력적이며 일단 대열이 무너지면 적에게 돌격한다. 화살세례를 퍼붓는 동안에는, 어느 한 목표물에게 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한 목표지역을 향해 하늘높이 쏘아 올린다. 이런 화살세례에 맞는다고 해서 치명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반격도 못하는 상태에서 주변의 전우들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되면 군대의 사기는 말도 못하게 떨어진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하늘높이에서 내리 꽂히는 화살을 몇 십 분간 보고 있는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사격무기를 모두 동원한 일제 사격, 화력집중 전술

화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은 몽골군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화살에서 공성무기에 이르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격무기를 한 목표물에 최대한 집중시킨 것은 그들이 최초일 것이다. 1221년 니샤푸르(Nishapur)를 포위했을 때에, 몽골군은 얼마나 많은 무기를 집중시켰던지 300대의 투석기와 3천 개의 석궁을 가진 수비병들을 거꾸로 공포에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숫자가 좀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몽골군이 활만 쏘는 경기병이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많은 수의 공성무기도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13세기 중국 성을 공격하고 있는 몽골 중기병 장수

몽골군만 가능했던 히트앤드런, 선회전술

몽골군은 화살세례를 히트앤드런 전술과 결합시켰다. 일개 중대(Jaghun)는 80명의 경기병과 20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됐다. 각 중대는 한 번의 공세에 20명을 내보내고, 한 번 나갈 때마다 여러 발의 화살은 쏜 후에 가장 마지막 대열 뒤로 되돌아갔다. 포위할 때쯤 되면 거리가 40~50미터 정도가 되는데, 이 정도 거리면 적의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는 반면에 반격은 피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였다. 대열로 되돌아갈 때에는 앞에서 설명한 파르티안 샷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도 여러 마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새로운 말로 바꿔 타 선회전술의 속도를 유지했다. 기병 한 명이 60발의 화살을 준비해 두기 때문에 거의 한 시간 이상의 화살세례를 퍼부을 수 있었다.

몽골군은 거의 모든 작전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는데,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이 적과 교전하게 되면, 이런 식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들은 절대로 백병전에 휘말리지 않고 말을 타고 계속 주변을 돌면서 적에게 화살을 쏜다. 그들은 적에게서 도망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후퇴하는데, 그때에도 안장을 거꾸로 앉아 적에게 조준사격을 해서 큰 피해를 입힌다.”

격이 다른 기초 전술, 위장후퇴

위장후퇴는 고대부터 존재한 스텝전투의 기초전술이다. 약간의 병력이 적에게 돌격했다가 후퇴를 해서 적이 추격하게 만드는데 추격전은 보통 오랜 시간 계속되어 적의 대열을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었다. 미리 정해진 지역에 도착하면, 다른 몽골군이 측면에서 기습을 하고 후퇴하던 부대가 선회하며 적의 정면을 공격했다.

아마도 1223년에 있었던 위장후퇴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몽골장군 제베(Jabe)와 수보타이(Subedei)가 드니에페르(Dnieper) 강변에서 킵차크 투르크(Kipchak Turks), 러시아(Rus) 연합군과 조우했다. 몽골군은 며칠 동안 후퇴를 하며 두 군대를 몽골본대가 기다리고 있는 칼카(Kalka) 강까지 깊게 유인해 연합군을 간단하게 전멸시켰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의 위장후퇴 전술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적과 맞서 싸우는 것만큼이나 후퇴하는 전술도 잘 사용한다. 추격자를 향해 뒤돌아 쏘는 화살공세는 전투를 이겼다고 생각한 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타타르(Tartar)인들은 충분히 적을 괴롭혔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선회해서 큰 소리를 지르며 대열을 갖춰 돌격한다. 이렇게 되면 순식간에 적은 괴멸된다.”

지연전술과 교란전술을 활용한 파비안(Fabian) 전술

몽골군은 때때로 원하던 장소가 아니거나 멀리 떨어진 아군이 집결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전투를 피했다. 유인후퇴와 달리 파비안 전술은 아예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는 것이다. 몽골군은 보통 작은 단위로 나뉘어져 포위당하는 것을 피하는데, 기회다 싶을 때에는 큰 무리를 이루어 적에게 기습을 가했다. 파비안 전술은 전투를 회피하면서 적을 피곤하게 만드는데, 특히 적이 야전이나 공성전에서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춘 경우에 사용했다. 몽골군이 계속 주변을 서성이면, 방어태세를 풀 수가 없어서 상대는 굉장한 피로가 누적됐다.

적이 기병을 처리하기 위해 땅에 창을 박아뒀다면, 몽골군은 당장 본대를 후퇴시키고 별동대가 출동해 적을 괴롭혔다. 결국, 몽골본대가 전면적 후퇴를 했거나 군량이 모자라 달아났다고 오판한 적이 방어진지에서 나오면 몽골본대가 갑자기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

적의 숨통을 조이는 측면공격과 이중포위 전술

칭기즈칸은 포위전술을 여러 번 사용했다. 적의 측면이나 후위가 노출된 경우, 또는 성을 공격할 때에, 그리고 적이 약할 때에 포위전술를 벌였다. 적이 지형지물을 잘 활용한다면 양쪽 강변에서 포위를 시도했다.

몽골군은 정면에서 위장공격을 하면서 후위에 진짜 공격을 퍼부어 적을 혼란시키기도 했는데, 적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해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포위망을 완성시키지 않고 일부러 한쪽을 열어두어서 적이 그곳을 활로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실제로는, 활로가 바로 함정이었다. 공포에 질린 적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규율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무기도 모두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1241년 모히(Mohi)에서 헝가리군을 학살했듯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에서부터 공격을 퍼부었다. 몽골학자 달라타이(Dalatai)는 이것을 개방(Open-the-End) 전술이라고 부르고 적군이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으로 보일 때에 주로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이중 포위도 스텝전투의 일반적인 전술로, 몽골군은 사냥하듯이 전투를 벌이는 특징이 있었다. 전사들이 탈출하기 힘든 그물처럼 점차 목표를 향해 포위망을 조여 들여갔다. 이 전술은 구사하는 데 많은 병사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몽골군 특유의 활 솜씨와 기동력이면 숫자가 훨씬 모자라도 충분히 이중포위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중포위에서는 몽골군의 양 날개가 적을 감싸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루스의 영토를 침략할 때처럼 훨씬 넓은 전선을 펼칠 때에도 사용됐다. 그런 식으로 몽골군은 한 지역을 포위한 다음에 점차 조여 들어가서 탈출로가 완전 차단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포로나 현지 징집병이 전면을 공격하고 몽골군이 바로 그 뒤를 따라서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들이 엉켜 싸우는 동안, 몽골군은 측면이나 후위를 기습했다.

성 전체를 굶겨 죽이기까지 하는 공성전술

몽골원정 초기, 칭기즈칸과 걸출한 부하 장수들이 가장 어려워한 게 바로 공성전이었다. 요새화된 도시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면서, 몽골군도 공병(징집병 또는 자원병)을 보유하게 된다. 주로 대포나 공성무기를 다룬 경험이 있는 무슬림과 중국인들이 공병부대의 주축이 되었다.


공성무기는 전투 후반에 사용됐다. 그들은 군대를 집결시키기 전에 주로 작은 그룹으로 원정을 했는데 그래서 큰 도시를 공격하려면 충분한 인력이 필요했다. 공략이 어려운 도시나 요새를 만나게 되면, 우선 모든 출입로를 막아 고립시키고 강력한 요새는 우회해서 통과하기도 했다. 일단 그 지역이 고립되면, 그 요새는 전략적인 가치가 없게 된다. 도저히 그 요새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 같으면, 대응 요새를 지어서 수비병이 아사하거나 항복할 때까지 계속 고립시켰다. 


공성전을 펼치기 전에, 몽골군은 앞서 점령한 도시나 마을에서 수많은 포로를 잡아와 10명 단위로 묶고 한 단위마다 한 명의 몽골군을 배치시켰다. 포로들은 나무, 돌과 흙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작업이나 행진 도중에 쓰러지는 포로는 모두 죽였다. 공격목표에 도착한 포로들은 해자 또는 방어용 참호를 자신들이 가져온 것들로 메워서 몽골군이 성벽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포로들은 참호를 파거나 방어벽을 세우기도 하며 죽을 때까지 거의 모든 잡일에 동원됐다. 


공성전 중에는, 무슬림 또는 중국 기술자의 지시에 따라 포로들이 공성무기를 세우고, 몽골군은 쉴 새 없이 공성무기를 발사해 수비병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몽골군은 나프타와 그리스 불을 사용했는데, 존 드 플라노 카르피니(John de Plano Carpini)는 이 잔인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죽인 사람의 지방을 꺼내 녹인 후 집에 부었다. 지방에 불이 붙으면 손댈 수 없이 불이 번졌다.”

몽골군은 충돌무기와 투석기뿐만 아니라, 터널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요새 근처에 강이 흐른다면 댐을 쌓아서 요새에 수공을 펼쳤다. 위험한 작업은 모두 포로들이 하기 때문에, 몽골군은 사거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투가 벌어질 때에만 모습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성벽이 무너지면 중장갑을 차려 입고 야습을 시도했다.


이런 전술은 몽골원정 기간 내내 사용되는 표준전술이었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정교하고 효과적인 공성전술을 보여줬는데, 블라디미르가 아주 좋은 예다. 먼저 도시를 벽으로 둘러싸서 고립시킨 후에 투석기, 화살, 불화살 그리고 포로가 운반하는 충돌무기로 도시에 포화를 퍼부었다. 성벽이 일단 무너지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밤에 말을 타고 돌격해 들어갔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심리전술과 기만전술

몽골군은 적을 설득해 스스로 문을 열게 하는 정치적 해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고 그로 인해 악명을 달고 다녔다. 몇몇 역사학자에 따르면, 몽골군이 점령하는 도시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만 학살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학살을 자행했다. 먼저, 몽골군이 지나간 배후를 위협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대학살의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시민들이 겁을 먹고 항복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반란을 일으킬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목적에서였다.


이처럼 몽골군은 군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소수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을 줄이는 수단으로 공포를 선택한 것이었다. 항복했다가 반란을 꾀한 도시들은 어김 없이 칼날 아래 사라졌다. 몽골군은 주둔군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의 여지가 있는 지역은 아예 말살해버렸다. 이런 무자비한 행동은 생산력 높은 자원을 정복하는 것이 전쟁목표라고 주장한 역사가들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이밖에도 몽골군은 선전전술을 사용해 자신들의 규모를 크게 과장해 퍼뜨리기도 했다. 1258년 몽케(Monke)는 겨우 40,000명으로 체츄안(Szechuan)을 공격하지만 병사 수가 100,000명이나 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적을 혼란시키고 공포에 빠지게 만들려고 갖가지 속임수를 사용했다. 1204년 나이만(Naiman)을 공격할 당시 칭기즈칸은 몽골 서쪽의 사아리(Saari) 스텝에 진영을 설치하고 한 명의 병사가 화톳불을 다섯 군데씩 지피게 해서 훨씬 많은 수가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숫자가 훨씬 많은 적을 상대할 경우에는, 몽골군은 후위 군대가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달고 곳곳을 뛰어다니며 먼지를 일으켜서 많은 지원군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속였다. 그리고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말에도 짚인형을 태우고 대기시켜서 숫자를 부풀렸다. 


몽골군은 적끼리 내분이 일어나게 조작하거나 적의 통치를 받던 소수민족(또는 다수민족)의 반란을 후원해 전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무자비한 악명을 일부러 활용하던 전술과 달리, 도움이 된다면 자신들을 해방자로 속이기도 했다. 또한 적의 라이벌끼리 경쟁하게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 기사 장 드 조인빌(Joinville)도 이렇게 기록했다.

“몽골군은 사라센과 싸울 때마다 그리스도교인을 보내 싸우게 만들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사라센을 보냈다.”

군대의 사기를 드높이는 미신(Supernatural) 전술

몽골군은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해 전투 승리의 가능성을 높였다. 전투에 앞서 사라센과 유럽인들이 신에게 빌었듯이, 그들도 텐가리(Tenggari, 하느님)의 힘을 빌었다. 그리고 무당이 벌이는 날씨 마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무당(Jadaci)은 날씨를 바꾸는 힘이 있는 ‘우석(rain stone)’이라는 특수한 돌을 사용해 폭풍우를 부르고 여름에도 눈보라를 소환해서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한다. 폭풍우가 불어 적이 혼란에 빠지면 그때에 몽골군이 공격을 했다.

칭기즈칸이 태양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16세기 그림

몽골군의 트레이드마크 기동성 활용 전략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군대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몽골군의 경우에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기동성을 살린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들이 사용한 말은 유럽의 말보다 속도나 힘에서는 뒤졌지만 지구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반병사가 3~5마리의 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두 마리를 잃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골군의 기동력은 20세기 기계화부대가 탄생하기 전까지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했다.

적을 섬멸할 최적의 타이밍

몽골군은 여러 단계를 거쳐 전쟁을 준비했다. 먼저, 그들은 군대를 총동원하기 위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적에 대한 사전정보도 충분히 모았다. 그 다음에야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선포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최전성기에는 적에게 공격을 하는 이유와 항복, 조공, 전멸의 선택권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쟁회의에서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한 전략이 합의되면 지휘관들이 선발됐고 이후 합류지점이 정해지고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몽골군의 전략은 어떤 군사작전을 펼칠 것인지 매우 신중하게 계획하는 단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모든 지휘관이 지켜야 하는 매우 엄격한 일정표가 전략의 핵심이 된다.”

- 데니스 사이너(Denis Sinor)

일정표가 매우 중요하긴 했지만, 몽골군은 당일 날씨가 변하면 유연하게 계획을 변경했다. 그들은 적이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공격했고 추운 겨울에도 공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원정계획은 매우 세밀하게 준비됐지만, 몽골 장수들의 지휘권 독립은 잘 지켜진 편이었다. 그들은 전반적인 일정표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는 전열전술 종진(Travel by Columns)

몽골군은 일반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전진했다. 카와라즈미안(Khawarazian) 제국을 침략할 때에는 4~5개의 경로를 선택했고 그 중 하나는 키질 쿰(Kyzyl kum) 사막을 관통하는 경로였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수보타이, 바투, 몽케가 세 방향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현대전과 같이, 종진하던 군대는 어느 한 목표지점, 특히 적의 전력핵심이 되는 지점에서 합류하는 경우가 많다. 카와라즈미안 원정에서는 사마르콴다(Samarqand)였고, 유럽에서는 부다페스트가 합류점이었다. 몽골군은 일정표에 따라 먼 지역까지 정찰을 하며 나뉘어 전진했지만 싸울 때는 하나로 합쳐졌다. 항상 작은 단위로 전진했기 때문에 대열이 늘어지지도 않았고 적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공격을 받은 후에야 몽골군의 위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집중시킬 시간이 없었다. 몽골군은 적의 방어 핵심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선호했지만, 전선을 여러 곳으로 확대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적의 연합을 사전에 차단한 야전군 섬멸 작전

몽골군은 적의 영토에 침투하기 전 적의 야전군을 섬멸하기 위해 다방향 종진을 주로 사용했다. 기동력 좋은 정찰병을 통해 적의 위치를 신속하게 찾아낸 후 적을 공격했고 적이 완전히 와해될 때까지 추격했다. 야전군이 섬멸되기 전에는 적의 거점을 공격하지 않았다. 물론 작은 요새나 도시는 기습해서 함락시켰다. 카와라즈미안 원정이 가장 좋은 예로, 수도인 사마르콴다를 함락시키기 전에 위성 도시와 요새를 먼저 함락시켰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장점이 있는데, 먼저 거점도시가 다른 도시와 연합해서 서로를 구원하지 못하게 막고, 위성도시의 시민이 거점도시로 몰려들게 한다. 함락된 도시의 참상과 몰려드는 피난민은 거점도시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저항할 음식과 물을 바닥나게 만든다. 이렇게 야전군을 섬멸시킨 몽골군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공성전을 펼칠 수 있었다.

적의 반격 여지도 확실히 꺾어버린 지휘관 척살 작전

적의 야전군이 섬멸되면, 몽골군은 적이 다시 병력을 모을 수 없게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적의 모든 지휘관이 죽을 때까지 계속 추격했다. 칭기즈칸은 몽골통일 전쟁에서 이 전략을 계속 사용했다. 초기 몇 번의 전투에서 적의 지휘관을 죽이지 못해 새로운 전쟁을 해야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경험 때문에 적의 지휘관 척살을 중요한 작전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몽골군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발전된 군사구조 덕분에 어떤 적보다도 전투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성공요인은 선조 때부터 배웠던 스텝 전술을 적에게서 배운 새로운 전술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제국확장 기간 내내, 그들은 실용적이었으며 언제라도 새로운 전략, 전술, 무기체계를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거부감 없이 새로운 전술을 실행에 옮겼다. 몽골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이는 전투를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의 어떤 군대보다도 정보력이 뛰어났다. 그 결과 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한 150년 동안 단 한 번도 심각한 패배를 겪지 않고 항상 승리만을 거둘 수 있었다.

* 외부 필진 우에스기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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