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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왜놈에게 치료받지 않겠다”던 독립군의 죽음

1928년 1월,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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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단장 편강렬 선생의 부음을 전하고 있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1928. 1. 20.)

의성단장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

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병원에서 편강렬(1892~1928) 의성단장이 순국했다. 선생은 3년 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 보석으로 석방돼 치료 중이었다. 향년 36세.


그는 36살에 이강년 의병진의 선봉장이 됐던 사람이었다. 힘으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렸고 민첩하고 가볍기로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다고 소문이 날 만큼 용맹한 전사였다. 법정 최후 진술로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하고 말할 만큼 기개도 드높았던 사람이었다.

16살에 의병 선봉장이 되다

애사(愛史) 편강렬은 황해도 연백 사람이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을사늑약(1905) 이후 영남지방 의병장 이강년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됐을 때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펴게 되자 그는 중군장 허위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해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편강렬은 1910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으나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히 활동하던 중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모의 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1911년 제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13년 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으나 2년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같은 해 가을 안악에서 최명식, 간병제 등과 군사주비단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이 조직이 일경에 탐지되며 편강렬은 체포돼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1년 출옥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경영하던 사기점은 모두 채권자에게 넘어가 버린 상황인지라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북경과 상해 등지를 드나들며 독립의 방도를 고민하다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1923년 10월 마침내 그는 산해관에서 강진지, 양기탁, 남정 등과 의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의성단은 조국의 광복과 자유독립국가의 완성을 목적으로 조직했는데 실천 행동으로 대원 양성·농촌 부흥·친일분자 숙청·일본인 기관 파괴 등 국내 공작과 만주 지역 내 통일공작을 내세웠다.

▲ 의성단장 편강렬의 공판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5. 1. 7.)

의성단의 근거지는 봉천성 회덕현·장춘현·길림성·하얼빈 등 27개소였다. 단원은 모두 250여 명에 이르렀다. 단기간에 단원을 훈련하는 훈련소를 설치하고 단원들은 농민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고 부정분자의 망동을 저지해 불의의 변고를 방지하도록 했다.

의성단장으로 펼친 대담무쌍한 항일투쟁

의성단은 주로 장춘선 공주령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백여 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다.


의성단은 편강렬의 지휘하에 남만주 각지에 있던 일본인 기관을 파괴하고 적과 친일분자들을 색출·처단했다. 편강렬과 의성단의 활동은 대담무쌍해 일제가 그를 잡으려고 10여 차례나 그를 포위했으나 그때마다 모면해 일제도 이를 매우 두려워했다.


1924년 편강렬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뒷날 만주국 수도 ‘신경’)성 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살상했고 대낮에 봉천(현 심양) 시내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세운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던 병원)을 습격해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사건에 크게 당황해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홍모 사무관을 특파해 편강렬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창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 어린 벽보를 붙여 일제를 비웃었다.

▲ 경북 영덕 장사리의 의성단원 의거 관련 시대일보 기사(1924년 6월 11일)

의성단의 활동은 비단 만주지역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단원들은 경상도와 평안도 등에서도 일경들과 직접 교전을 했다. 1923년 6월 박일훈(2014 건국훈장 애국장)이 의주 영산적경주재소에서 4곳의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 9곳에 총상을 입고 순국했다.


1923년 12월 김명제(2003 건국훈장 애국장)가 장춘에서 무기를 수령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발각돼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맹렬히 싸우다가 전사 순국했다. 


1924년 김홍진과 김창진(1995 건국훈장 애국장)이 경북 영덕 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검문에 불응하고 자동 연발총을 난사하는 일경들과 교전, 수적 열세로 순사 3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순국했다.

▲ 의성단장 편강렬의 최후진술을 전한 시대일보 기사

편강렬은 당시 만주지역에 여러 무장항쟁 조직이 흩어져 있어 독립운동 전선이 약화된다고 보고 통합운동에 나섰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주도해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대한광정단,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노동민족회의 대표들과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고 하얼빈에서 각 독립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로 뭉칠 것을 의논했다.

만주 독립군 통합운동 중 다시 감옥으로

이 같은 활동을 벌이던 중 1925년 하얼빈에서 주요 업무를 마치고 길림에 갔다가 밀정의 밀고로 장시간 총격전 끝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밀고자는 일제의 주구 김성곤이라는 자로 이범석에 의해 처단 사살됐다.


독립운동단체들에 의한 전만통일주비회는 편강렬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갇히자 위축되기 시작했으나 그가 주도한 통합운동은 결실을 보아 1925년 남만주지역을 통합하는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조직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신의주로 압송된 편강렬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척수염으로 보석됐다. 선천 의동병원에 입원 치료했으나 차도가 없어 친지들이 시설이 갖춰진 일본 병원에 옮길 것을 권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서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결국 편강렬은 길림으로 가던 도중 안둥(현 단둥)의 병원에서,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 줄 것이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 강화 평화전망대에 세운 애사 편강렬 의사 추모비(왼쪽). 오른쪽은 임진왜란 승전비다.

편강렬이 간 지 열일곱 해 뒤에 조국은 해방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쟁쟁한 독립운동가들 속에서 편강렬이란 이름은 낯설다. 경북 김천의 남산공원과 강화의 평화전망대에 이북 실향민들이 세운 추모 빗돌로 그가 살아서 보여준 불굴의 투혼과 담대한 기개를 상상할 뿐이다.


선생이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할 때 쓴 옥중시 한 편이 동아일보에 실렸다. 감옥의 고통 속에 망국혼을 노래한 시를 요즘 어법으로 고쳐 읽으면서 시대와 맞섰던 선열의 마음을 새삼 느꺼워하지 않을 수 없다.

▲ 동아일보에 실린 의성단장 편강렬이 병 보석으로 나와 치료를 받고 있다는 기사와 그가 쓴 옥중시(왼쪽)

양양한 압록강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 곳 어디이뇨.

유유한 나의 심사

너를 따라 그지없다.

흘립천장(屹立千丈) 높이 선

깊은 담장 안 너 그리워

탄식하는 너의 옛 주인

나를 네가 보느냐.

창공에 밝아있는 저 명월

아- 누구를 위하여서

교교히 비치는 철창(鐵窓)에

깊은 한(恨)은 망국혼(亡國魂)이 느꺼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벗어나

사랑하는 너를 즐길쏘냐?



- 편강렬의 옥중시, 동아일보(1926. 9.26.)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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