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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역사상 일본 상대로 최대 승리 이끌어낸 '이 장군'

조회수 2020. 1. 15. 14: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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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2018년 1월 15일 직썰에 게재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대한광복군을 창설했고 총사령에 지청천 장군을 임명했다.

195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대한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1888∼1957) 장군이 급서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탈출해 광복군이 됐고,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인 대전자령 전투의 지휘관이었다. 향년 68세.


지청천은 서울 출신이다. 본명은 대형, 일명 이청천, 호는 백산이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이듬해 통감부의 압력으로 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 유학생으로 동경 육군중앙유년학교에 들어갔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었다. 유학 도중 한일 강제합병(1910)이 돼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로 편입됐고, 1914년에 26기생으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 26기 동기생으로는 홍사익(1887~1946)과 이응준(1890~1985)이 있었고, 김경천(1888~1942)은 3년 선배였다. 

일본 육사 출신의 독립군 지도자

생도 시절에 김경천은 세 명의 후배와 함께 요코하마에서 조국이 부르면 독립전쟁에 투신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킨 사람은 김경천 자신과 지청천 두 사람뿐이었다. (김경천 장군의 증손녀 김올가의 증언) 김경천은 ‘백마 탄 김 장군’으로 불리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항일투쟁을 벌였다. (1998 건국훈장 대통령장)

▲ 일본 육사 출신의 김경천(23기)은 26기 3명의 후배와 독립전쟁에 투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킨 이는 자신과 지청천뿐이었다.

홍사익은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랐고 2차대전 종전 후 필리핀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됐다. 이응준(1890~1985)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군에서 복무했고 최종 계급은 육군 대좌(대령)였다. 그는 해방 후 국군에 들어가 육군 중장까지 올랐다. 당연히 두 사람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지청천은 중위로 진급한 후 1919년 만주로 망명해 대일 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일종의 전술 교범)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그는 ‘교성대장’이 돼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했다.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 군정부·서로군정서의 간부가 됐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 사건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을 학살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를 불태우는 ‘간도 학살’(경신참변)을 자행했다. (관련 글: 청산리 전투, 대승으로 시작되다


지청천은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의 안도현 밀림으로 이동해 서일,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이 됐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는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옮겨갔다. 


1921년 6월 소련 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지청천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해 체포됐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됐다. (관련 글: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에서 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지청천은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돼 활동했다. 이후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에 힘써 대한 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했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됐다. 


김좌진이 저격 당한 뒤 홍진, 신숙 등과 함께 한족 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 독립군’을 편성해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했다. (관련 글: 청산리의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1931년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중국호로군(만주 지역의 군벌 계통의 군대) 사령관과 협의해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다. 1932년 한중연합군은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독립군 항일전 사상 최대 승전의 주역

▲ 1933년 한국독립군과 중군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던 대전자령 고개길(2002)

1933년 6월 28일 한중연합군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노송령을 거쳐 진군하고 있었다. 이때 대전자령(다덴츠링)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북방 5리 지점의 노무제하로 이동,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정보를 탐지한 연합군은 2일 대전자령으로 급히 가서 전투 준비를 마쳤다.


연합군은 부대를 3개로 나눠 각 요지에 배치했는데, 공격의 주력은 한국 독립군이 담당하게 됐다. 7월 3일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하는 줄 모르고 대전자령을 유유히 넘고 있었다. 일본군 후미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으며,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관련 기사: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 기념 촬영

이 전투의 전리품 분배 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부대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면서 연합은 깨어졌으나 독립운동사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자못 크다.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가는 실마리가 됐고 뒷날 지청천이 한국광복군(1940) 총사령관이 되고 황학수, 오광선, 조경한(이상 1962 독립장), 고운기(1963 독립장) 등 간부들은 임정과 광복군의 주요 지도자로 성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 한국 독립군의 간부로 대전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청찬 사령관 휘하 지휘관들

무엇보다도 대전자령 전투는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정 계열로 계승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목표와 성과가 임정으로 본격 수렴되기 시작했다. 백범의 제의에 따라 지청천을 비롯한 독립군 간부들이 이듬해(1934) 개설된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서 한인 특별반의 군사훈련을 맡기도 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돼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후 이듬해인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 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인으로 살다

지청천이 귀국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청년단체를 만들 것을 권고했고 1946년 9월 지청천은 대동청년단에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1948년 1월부터 정부 수립론을 놓고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나뉘게 되자 그는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는 1948년 4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신익희 등과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다. 


지청천은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6월 1일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됐다. 정부 수립 뒤 초대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됐다. 1950년 2대 총선에서 재선됐고 이후 국회 상임위원장, 자유당 중앙위원 등 정치인으로 살았다.

▲ 삼청동에 설치된 ‘지청천 장군 집터’ 표석
출처: ⓒ두피디아
▲ 지청천 장군은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됐다.

지청천의 장례는 1월 21일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거행되고 국립현충원 임정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고 1995년에는 삼청동 집터에 ‘지청천 장군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해방 후 귀국하면서 두 아들을 국방경비대에 입대시켰는데 차남은 육군 소위로 1948년 여순사건 때 토벌대로 교전 중 전사했다.

▲ 딸 지복영이 펴낸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와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될 때 여군으로 입대해 활동했던 딸 복영(1919~2007, 1990 건국훈장 애국장)이 1995년에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항일 무장투쟁 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문학과지성사)을 펴냈고 사후에 아들인 이준식(현 독립기념관장)이 정리한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민족문제연구소, 2015)이 나왔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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