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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오늘, 중공군에 밀려 1.4 후퇴하던 피난민들의 상황

압록강 진격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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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4일 직썰에 게재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 1.4 후퇴 때 피난민의 행렬.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1.4후퇴가 시작됐다.

1951년 오늘, 1·4후퇴

1951년 1월 4일 전년도 12월께부터 시작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전선에서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내주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고 1월 14일 유엔군은 북위 37도선의 중서부 전선에서 30만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된 것이었다. 일방적인 패퇴 끝에 전세를 뒤집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때만 해도 승리는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공군(관례대로 표기함)의 등장과 함께 승리는 신기루처럼 스러졌고 전황은 불과 서너 달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뒤집힌 전세

그것은 이 전쟁의 승패가 단순한 전력의 차이나 명분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그들의 전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파죽지세로 치고 내려온 북한군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국제연합(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한 것은 10월 1일이었고 10월 10일에는 원산을 탈환했다.

▲ 인민지원군 사령관

그러나 10월 19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중국 인민지원군(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명칭, 사령관 펑더화이) 약 2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전쟁 발발 초기부터 중공은 경고를 거듭했지만,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오판하고 있었다. 본토를 통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대만 문제를 안고 있는 중공의 한국전쟁 개입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8월 20일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조선 문제의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했으며 9월 30일에는 다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는 사태라고 밝혔다. 


또한, 10월 3일에는 북경주재 인도대사를 통해 만일 한국군만이 38선을 넘을 땐 중공의 파병은 없겠지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공군이 파병될 것이라 해 이를 미국에 전달하도록 했다. 


10월 8일 유엔총회는 유엔군의 북진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해방군 동북 변방군을 중공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해 출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은 북한과 소련에 각각 인민지원군 편성과 파견을 통보했다.

▲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동북 변방군을 중공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해 출동을 명령했다.

10월 9일 미 제1기병사단은 개성 부근에서 38도선 돌파해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에게 즉각 항복을 요구했다. 승리로 가는 길은 거침없어 보였다. 북진을 조심스러워하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도 모든 진격 제한 지시를 거둬들이고 전 예하 부대에 압록강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국군이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초산에 이른 것은 10월 26일 이제 통일은 떼어놓은 당상 같았다. 그러나 같은 날 중공군 본대(제50군·제66군)가 추가로 압록강을 건넜고 국군 제2군단은 중공군 대병력과 충돌하고 있었다. 


전날인 25일에는 중공군 제40군 120사단이 국군 제1사단과 운산과 온정에서 조우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중공군의 참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1월 1일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실시되면서 국군 제6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내전과 항일전쟁으로 단련된 인민해방군의 전력은 낯선 만큼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11월 21일 미 7사단 17연대는 압록강 상류 혜산진에 들어갔고 24일 맥아더는 전쟁종결을 위한 총공세를 명령했다. 한편, 27일에 국군 제2군단의 주 저항선이 무너졌고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됐던 미군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다음 날 유엔군사령부의 긴급 작전회의에서는 평양, 함흥, 원산 철수를 결정했다. 중공군의 참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새로운 전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면서 만주로의 확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확전이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것으로 본 트루먼은 이에 명백히 반대했다.

12월, 유엔군 전면 후퇴 결정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이 미 제10군단을 기습 공격했다. 한반도 북단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벌어진 17일 동안의 전투에서 미군은 1만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7보병사단과 제1해병사단은 5군단의 지원사격 하에 전멸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철수 작전을 완료한 때는 12월 11일이었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이 전멸 위기를 겪으며 탈출 작전을 벌이고 있던 12월 1일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의 전면 후퇴를 결정했다. 이틀 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으로 철수 작전을 개시했다.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한 것은 12월 4일이었고 다음날 중공군이 평양에 진입했다.

▲ 흥남철수 때 엘에스티(LST, 전차상륙함) 한 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했다.

▲ 흥남부두에 운집한 피난민 30만 명 가운데 배에 오른 이는 9만 1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12월 15일 미 제8군은 38선에 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미 제10군단은 흥남 철수작전을 전개했다. 흥남 철수는 원산이 적에게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이 흥남 해상으로 철수한 작전이었다. (관련 글: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에 밀려 흥남철수 시작)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집결한 병력은 10만 5천여 명이었지만, 배를 타고자 대기하고 있던 피난민은 30만 명이었다.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처음에는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했으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과 미군 고문관 현봉학의 설득으로 마지막에는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했다.

‘바람 찬 흥남부두’의 흥남철수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면서 ‘바람 찬 흥남부두’(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 중)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엘에스티(LST, 전차상륙함) 한 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했지만,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이었다. 그것은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를 포기함으로써 이뤄진 것이었다.


피난민 수송에는 함정뿐 아니라 징발된 민간 선박도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화물선)이 됐고 온양호(대한해운공사)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됐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선적했던 무기를 버리고 대신 1만 4천의 피난민을 태웠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로 가는 피난민들. 여기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선장의 결단으로 선적했던 무기를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000여 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철수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사흘 동안의 항해 중에 5명의 아이까지 태어난 이 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가 타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피난민들이 흥남에서 철수를 완료한 것은 작전을 시작한 지 열흘 만인 12월 24일이었다.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으로 흥남항과 주변 시설물을 남김없이 폭파했다.

▲ 미 8군사령관

같은 날 북한군과 중공군은 38선을 돌파해 남진을 시작했고 정부는 수도권 일원에 피난령을 내렸다. 차량 사고로 순직한 워커 제8군사령관 후임으로 12월 26일이 리지웨이 중장이 부임했고 1950년의 마지막 날에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가 시작됐다.

공산군,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

1951년 1월 2일 국군 제1·6사단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고 이틀 후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월 5일 중공군이 서울에 진입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한 것은 두 달 뒤인 3월 14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오는 것처럼 보였던 통일의 꿈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6월에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휴전을 제의했고 7월 10일 첫 번째 휴전회담 본회의가 개성에서 열렸다. 그리고 이 회담은 2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고 1953년 7월 27일에야 조인돼 한국전쟁은 비로소 정전 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65년이 훌쩍 흘렀다. 월남 피난민 등 1천만 이산가족 가운데 이 분단이 이토록 오래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실향민 1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2018년 현재 남북의 대치는 여전하다. 곧 열릴 동계올림픽이 평창 데탕트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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