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포로 마취 없이 생체실험한 일본 731부대

조회수 2019. 12. 26. 10:5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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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 731부대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다.
▲ 러시아의 최동단 하바롭스크시. 1949년 여기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 관동 전범 재판이 열렸다.

1949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하바롭스크(Khabarovsk)의 장교회관에서 일본군 전범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작됐다. 30일까지 엿새 동안 열린 재판을 통해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관동군 지도부와 생체실험 및 세균전 관계자들에 대한 단죄가 이뤄졌다.

일본군 12명, 2~25년 강제노동형 선고

재판 결과 관동군의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를 비롯해 세균 무기 제조와 생체실험을 한 가지츠카 류지 군의 부장, 다카하시 다카아쓰 수의 부장이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제조부장 등 8명의 731부대 장교와 위생병 등은 2년에서 20년까지의 강제노동형에 처했다.


2~3년 형을 받은 전범은 형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수형 중 병사하거나 자살한 이를 제외한 나머지 전범들은 1956년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 간의 국교가 회복된 뒤 감형돼 모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731부대에서 자행된, 포로나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과 생체해부는 극악한 전쟁범죄였다. 종전 후 이 비인도적 범죄는 인류의 이름으로 단죄돼야 마땅했지만 실제로는 승전국의 이해에 따라 처리됐다.

▲ 하얼빈 평방에 있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731 부대 유적지 정문

일본 A급 전범을 기소한 도쿄재판에서 731부대는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731부대의 실태는 1946년 10월께 소련의 포로가 된 일본인 세균전 관계자 조사를 통해 얼마간 밝혀져 있었다. 소련은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간부 3명의 심문을 요구했지만 결국 도쿄재판에서는 731부대와 세균전은 다뤄지지 않았다.

미군, ‘연구 데이터 대가’로 731부대 면책

일본은 미국에 연구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세균전 관계자의 소추를 면제하는 약속을 연합군 총사령부와 교환하고 있었다. 데이터의 독점 입수는 미소 냉전 구조에서 미국의 세계전략과 국익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1947년 8월, 미국 정부는 전범 면책을 추인했다.

“일본 과학자가 수백만 달러와 긴 세월에 걸쳐 얻은 데이터다. 이러한 정보는 우리 자신의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실험을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는 오늘까지 총액 25만 엔으로 수행되었으며, 연구에 걸리는 실제 비용에 비하면 미미한 금액이다.”

- 미국 정부의 조사관 에드윈 V. 힐(Edwin V. Hill)의 조사보고서 중에서
▲ 1935년에 주변 4개 마을의 주민을 강제 퇴거시키고 건설을 시작해 1939년에 완공한 731부대 전경
▲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

하바롭스크 재판에서는 세균 폭탄 실험에 관한 증언, 생리학적 실험에 관한 증언, 세균 실험에 관한 증언 등이 공개됐다. 738쪽에 이르는 공판 기록은 생물 병기 개발을 향한 일본군의 작전이나 행동 내용을 담은 귀중한 사료가 됐다.


중국에서는 1956년에 포로인 전 대원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지만, 그 전해인 1955년에 저우언라이 수상이 일본군에 대한 은사를 베풀어 5명만 기소됐다. 사형은 없었고, 최고형은 731부대의 군의관이 받은 징역 13년이었지만 이듬해 그는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패전 전후 731부대의 의사 53명은 비행기로 귀환했고 일반 대원들은 특별열차 편으로 신속히 귀국했다. 의사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도 없이 학계로 돌아가 중요한 위치를 얻었다. 이들은 대부분 의과대학 교수, 전염병 연구소, 의료업체 임원, 자위대 등에서 의사로 일했다. [대표적 사례 참조]

▲ 731 부대에서 실험을 주도한 전범들은 전후 일본에서 상류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 1942년 일본의학회 총회 때 미생물분과회의 기념촬영. 이들은 전후에도 뚜렷한 반성 없이 살았다.

731부대에서 자행된 가공할 ‘생체실험’

인체실험을 한 건 일본만은 아니었으나 그 단죄는 달랐다. 독일에서도 인체실험이 자행돼 여기 가담한 23명이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됐고 이 가운데 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인체실험에 관한 국제적인 윤리 기준인 헬싱키 선언의 기초가 된 뉘른베르크 강령이 제시된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었다.


1932년에 설립된 731부대는 일본제국 육군 소속 관동군 예하 비밀 생물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중국 하얼빈에 있던 관동군 방역급수부다. 교토 제대 출신의 의사 이시이 시로가 초대 부대장으로 부임한 뒤 ‘이시이 부대’로도 불리었다.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정수된 물을 공급하는 급수 전문 전투 지원 부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이 부대의 주 임무는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실험이었다.

▲ 731 부대에서의 세균 안개 폭탄 실험의 모습
▲ 실험 후 폐기된 마루타들. 모든 피실험자는 마취 없이 실험에 동원됐다.
▲ 직접 실험 중인 이시이 시로. 그는 끝내 전범으로 단죄되지 않았다.
▲ 포로의 몸에 폭탄을 심어 터뜨리는 실험을 하기 전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731부대에서는 인체실험의 피험자를 ‘마루타’(‘통나무’라는 뜻)라고 불렀다. 마루타는 주로 헌병대에 잡힌 반만주 항일운동가 등이며, 중국인 외에 러시아인, 조선인도 있었다. 하바롭스크 재판에서의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제조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특설 감옥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수용됐다. 이 부대에 이송된 3천여 명은 실험대상이 됐고 한 명도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731부대는 가장 유효한 생물 병기라는 페스트 감염 벼룩(페스트탄)을 개발했고, 페스트균의 독력을 시험하면서 5명의 마루타를 살해했다. 동상실험은 마루타의 손발을 인위적으로 얼려서 관찰했고 탄저균과 유행성출혈열도 실험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마취 없이 이뤄졌는데, 이는 실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보병 소총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수용자를 일렬로 세워두고 실탄을 발사해 총탄의 관통력을 실험했고 사람을 대상으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 등을 시험했다. 이 밖에 이들이 자행한 인체 해부와 실험은 너무 끔찍해서 차마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 731부대원 기념촬영(위) 동경대학회에 함께한 이시이 지로(아래)
▲ <731 부대와 의사들>(2014)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자 731부대는 부대의 핵심 시설을 폭파하고 수용하고 있던 ‘마루타’ 전원을 가스로 살해했다. 서류나 연구 자료는 대부분 소각 처분하고 부대원과 가족들에게 탈출명령을 내렸다. ‘국체 수호’(최고 책임자인 천황의 책임 회피와 천황제 유지)를 위한 은폐 공작이었다.


결과적으로 731부대의 공작은 성공했다. 그들은 미국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소추되지 않았고, 천황도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귀환한 731부대의 의사들은 일본 의학계에서 중견의 지위를 얻었다. 


1947년 패전 후 처음으로 개최된 일본의학회 총회에서도 전체적으로 전쟁 가담에 대한 검증과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51년, 일본의사회는 전시에 이뤄진 의학자·의사의 가해에 대해 ‘반성’한 뒤, 세계의사회에 입회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70년대 이후, 나치스에 의해 친척이 살해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후란트 브라우 교수는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알게 된 후 ‘731부대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일본의 의사가 스스로 품위를 더럽힌다.’라고 일본의사회의 책임을 추궁해 왔다.


그러나 일본의사회는 이미 논의가 끝난 안건이라고 생각해 이를 ‘무기한 연기’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일본 의학계는 ‘인간의 가치’와 같은 검증과 반성 없이 진실을 은폐하고 불문에 부치는 상황을 용인해 온 것이었다.

일본 의학계의 뒤늦은 성찰

전후 반세기가 지난 2009년, ‘일본 의료인들이 과거 전쟁 시에 731부대를 비롯한 전쟁터에서 시행한 인체실험을 포함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 스스로 진지한 검증을 하고 그 교훈을 살리고자’ 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회가 비로소 설립됐다.


이 단체에서 펴낸 <731부대와 의사들>(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4)은 바로 그러한 검증과 성찰의 일부였다. 비록 전후 전범 재판을 통해서 단죄되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성찰이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다가 숨져 간 숱한 사람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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