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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한번 안 쏘고 적 무너뜨린 역대급 기습 작전 7가지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대담했던 기습 작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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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미 레인저스의 카바나투안 구출 작전

1944년 10월 미군은 필리핀에 돌아왔다. 2년 전 필리핀을 잃을 때는 바탄(Battan) 죽음의 행진이 있었고 75,000명의 미군과 필리핀군이 코레히도부터 북쪽의 포로 수용소까지 100km를 걸어가는 동안엔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는 20,000명까지 늘어났고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포로가 잡힌 전투였다.


일본군은 두려웠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부대가 필리핀을 탈환하면 전범재판에서의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얼마 남지 않은 미군과 영국군 증인들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513명을 카바나투안 근처의 수용소에 가뒀다. 대학살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미군은 1945년 1월에 육군 레인저에서 자원한 127명과 약 200명의 필리핀 게릴라를 투입해 포로를 구출하는 작전을 세웠다.


포로 수용소는 평지인데다가 주변이 채소밭이었기 때문에 레인저는 어둠을 틈타 1.5km 정도를 한 시간 동안 포복전진했다. 수용소 근처에는 9,000명 정도의 일본군 부대가 있었는데 작전이 실패하면 몇 분만에 달려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군 전차가 다가올 다리는 필리핀 게릴라가 막기로 했는데 실제로 그 역할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나머지 게릴라는 부근의 물소 마차를 모아서 걸을 수 없는 포로들을 실어나르는 역할을 맡았다.

미 공군도 노스롭 P-61 블랙 위도우 전폭기를 보내서 경비병들을 숨게 만들었다. 야간 전폭기인 이 비행기는 짙은 매연을 일부러 뿜어대며 선회해 경비병들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카바나투안 기습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513명의 포로 중에 심장마비로 죽은 한 명과 화장실에 숨어서 뒤늦게 구출된 한 명을 제외한 511명 전원을 구출했다. 기습군은 2명이 죽고 23명이 부상당한 반면에 일본군은 523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경비병들은 레인저의 소화기에 완전히 전멸당했다. 


재미있는 건, 포로들은 레인저가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걸 믿지 못했다. 레인저는 자신들이 미국인이라고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고 블랙 위도우를 처음 본 포로들은 그 전폭기가 소련이나 독일군 비행기라고 믿었다고 한다.

2. 1863년 모스비(Mosby)의 페어팩스(Fairfax) 기습

적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보다 더 유능한 적이라면. 미국 남북전쟁 기간 중, 남군 중위(후에는 대령) 존 싱글톤 모스비는 버지니아 기병연대 그리고 북군이 ‘그저 말 도둑놈’이라고 비하하던 비정규군을 이끌고 있었다.


군의 전투규칙에서 모스비의 부대는 ‘파르티잔 레인저’로 분류되었고, 그들이 노획한 물품은 가질 수 있게 허락되었다. 그리고 기차, 보급마차, 대포, 포로와 말까지 모든 것을 노획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성과 중 가장 갚진 노획물은 1863년 3월 9일 페어팩스를 야습하면서 포로로 잡은 북군 장군 에드윈 스타우톤이었다. 


모스비는 29명의 레인저를 이끌고 자신을 말 도둑놈이라고 욕했던 영국출신의 북군 기병지휘관 퍼시 위드햄 대령을 사로잡으려고 했었다. 남군은 진심으로 그를 잡고 싶어했지만 그는 워싱턴을 방문 중이었다.

그날 밤 야습에 참가했던 병사 중 제5뉴욕기병대를 탈영해 남군에 합류한 제임스 에이메스 하사가 있었는데, 남군 레인저스는 그의 도움을 받아 페어팩스 부근의 북군 경계선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경계가 허술한 곳만 찾아 다니다가 검문을 만나면 에이메스가 북군 사투리로 “제5뉴욕기병대야.”라고 대답해 위기를 모면했다.


비가 오고 달도 없던 밤이라 모스비 부대는 새벽 2시에 간신히 다시 모였고 페어팩스 광장으로 조용히 잠입했다. 기습을 당한 경계병은 바로 항복했기 때문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경험이 많은 모스비는 경계병들을 심문해서 윈드햄은 없고 스타우톤이 근처 사령부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남군 군복을 입은 모스비는 스타우톤의 사령부 문을 두들기며 "제5뉴욕기병대가 스타우톤 장군에게 급한 전갈이요!"라고 외쳤고 문이 열리자 4명의 남군이 밀고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색된 이야기에 따르면 모스비는 잠들어 있는 스타우톤을 발견했고 잠옷을 들어올린 후에 그의 배를 세게 때렸다고 한다. 잠이 깬 스타우톤에게 "장군, 모스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라고 물었다. 스타우톤이 "들어봤네. 그를 잡았나?"라고 묻자 "내가 모스비요. 그리고 당신을 잡았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총 한 발 쏘지 않고 모스비와 병사들은 적의 요새에서 장군 한 명, 대위 두 명, 30명의 병사와 58마리의 말을 잡아왔다. 그러나 모스비가 거둔 큰 성과를 상관인 피츠휴 리는 별 것 아닌 수준으로 치부했다. 후에 모스비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기록했을 정도였다.

"나는 매일 아침 보고서를 가져다 올리는 병사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스타우톤과 피츠휴 리가 웨스트 포인트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피츠휴 리가 모스비의 악명에 질린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어쨌든 모스비는 남군의 새 영웅이 되었다.

그가 다음에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3. 1943년 스코르체니의 일 투체 구출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는 참모, 전문간, 모의 실험, 연습 없이도 2차 대전 코만도 기습 중에 가장 대담하고 성공적인 기습을 해냈다. 히틀러에게서 직접 지시를 받은 젊은 SS 대위는 헐리우드 제작자도 지나친 환상이라고 거부할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냈다.


1943년 7월 25일,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쫓겨난 후에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탈리아는 연합군과 항복 협상을 할 계획이어서 '일 두체(IL Duche, 무솔리니의 별명)'를 건네주고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고 했다.

무솔리니는 감금되었지만 독일은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스코르체니는 로마로 날아가서 바텐더, 과일 장수, 이탈리아 해군장교, 사기꾼 등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만나면서 무솔리니에 대한 소문을 모았다.


그는 결국 로마 동쪽 산 그란 사소(Gran Sasso) 정상의 외진 호텔이 문제의 장소라는 것을 찾아냈다. 호텔은 가파른 산악 철도로만 갈 수 있었는데 항공 정찰로 호텔 뒤에 작은 초원처럼 보이는 공터가 있는 것도 찾아냈다. 스코르체니는 지상군과 글라이더 강습군을 데리고 그란 사소로 갔다. 코만도 중 일부가 철도역을 장악해서 이탈리아 지원군을 막는 동안 다른 코만도가 12대의 10인용 글라이더에 나눠 타고 호텔을 기습해 무솔리니를 꺼내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작전은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초원으로 정찰되었던 곳은 보도석이 깔린 좁은 땅이었고 글라이더는 착륙하자마자 부숴져 버렸다. 스코르체니는 기습작전에 강제로 끌고 간 이탈리아 장군 페르디난도 솔레티를 앞세웠다. 스코르체니가 예상한 대로 이탈리아군과 경찰병력은 솔레티를 보자 사격을 멈추었고 스코르체니는 2층에서 무솔리니를 찾아냈다.

이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남았다. 악명높은 독재자를 데리고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스코르체니는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던 Fi 156 슈토리히를 착륙시키고 뒷좌석에 무솔리니를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짐칸에 몸을 구기고 탔지만 2인승 비행기로는 이미 과적 상태였다. 코만도가 미리 치워둔 500m 정도의 경사로를 내려가던 슈토리히는 계곡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간신히 이륙할 힘을 얻었다.


스코르체니는 무솔리니 구출작전으로 훈장을 받아 승진했고 이후에도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1944~1945년 벌지 전투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독일 코만도에게 미군 군복을 입히고 후방에서 테러와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악명 높은 활약을 했다. 종전 후에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석방되었다. 그는 1975년에 암으로 죽었다.

4. 1970년 미 특수부대의 선떠이 기습

결과부터 말하면 이 기습 작전은 실패했다. 선떠이 기습 작전은 북베트남 하노이 부근 선떠이에 있는 60명의 미군 포로를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1970년 11월 21일, 특수부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 수용소를 수색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그 의미는 상당히 컸다.


그 수용소에는 분명히 포로가 있었고 격추된 조종사를 포함해 수백 명의 미군 포로가 북 베트남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고 있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군 전략가들이 구출 작전을 기획했다. 선떠이 기습은 미국시민과 모든 포로에게 미국이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전이었다. 


이글린 미 공군 기지에 마련된 모형 수용소에서 3개월 동안 연습을 한 끝에 미 육군 특수부대와 미 공군 자원병이 태국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아더 사이몬(1944년 카바나투안 기습 참가자)이 이끄는 56명의 그린베레가 3대의 헬리콥터에 타고 하노이 서쪽 35km 떨어진 적의 소굴로 바로 날아갔다. 구출 팀은 수용소 경계병과 전투를 벌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선떠이 부근에서 20분 내에 달려올 수 있는 북 베트남군은 12,000명이나 되었다.

일부에서는 작전이 이미 노출되어서 적의 함정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함정은 없었고 미 특수부대가 겪은 최악의 피해는 발목을 삔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수용소에 착륙하기에는 헬리콥터가 너무 큰 탓에 뛰어내리면서 입은 부상이었다.


총 29분 만에 경계병과의 전투, 수용소 2개 감방 수색, 포로가 있을만한 장소 수색, 재탑승과 출발 과정이 모두 끝났고 북 베트남군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200명 사살이라는 전과는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수십 명의 북 베트남군이 전투 중에 사살된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일부 특수부대원은 선떠이가 러시아와 중국군의 기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기습 과정에서 일부가 죽었을 수도 있지만 국제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한 두 나라가 인정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왜 미 정보국은 포로들이 선떠이를 떠난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최소한 한 명의 정보원은 수용소가 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부의 정보조직은 너무 나뉘어져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던데 뭘."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변명이 되어 있었다. 


1972년, 또 한 번의 미군포로 구출작전이 수립되었는데 1개 해병과 2개 육군 사단 약 60,000명이 하노이를 습격해 그동안 파악된 모든 포로 수용소를 수색하려고 했다. 아쉽게도 이 작전은 승인되지 않았는데 성사되었다면 사상 최대의 기습작전이 될 뻔했다.

선떠이 구출작전은 화질이 좋지 않거나 너무 길어서 일반적인 구출작전 동영상으로 대체합니다.

5. 1976년 이스라엘 국방군의 엔테베 구출 작전

1976년 이스라엘의 우칸다 엔테베(Entebbe) 공항 기습 작전은 역사상 가장 대담한 구출작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정예 특수부대와 세계 최악의 병사(독재자 이디 아민의 민병대 수준의 군대)가 한 곳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이 작전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6년 6월 27일, 두 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독일인 공모자들이 프랑스 항공 에어버스 A300 항공기를 탈취해서 248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엔테베로 피납했다. 우간다에 도착한 테러리스트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은 풀어주고 85명의 유대인과 이스라엘 인질(승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12명의 프랑스 승무원과 기타 20명 포함)을 공항 터미널에 억류했다. 4명의 팔레스타인 공범이 지상에서 합류했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던 아민의 군대도 합류했다.

납치범들은 세계 여러 곳에 수감된 53명의 테러리스트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인질을 한 명씩 죽이겠다는 최후 통첩을 날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게도 이스라엘 국방군은 3일만에 특수부대원을 모아 2일간 연습을 하고, 처형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7월 3일 오후에 우간다로 출발했다. 4대의 C-130 허큘레스 수송기에는 사예레트 마트칼(Sayeret Matkal) 정예부대원, 정규군, 소형 보병수송차, 한 대의 검은 색 벤츠와 2대의 랜드로버가 실려 있었다. 리무진과 SUV는 아민이 근처 마루리타니아에서 돌아올 때에 사용하는 우간다 VIP 차량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수송기와 함께 보잉 707 두 대가 투입되었는데, 한 대는 작전 중에 엔테베 상공을 선회하면서 지휘통제소 역할을 했고 다른 한 대는 케냐 나이로비에 착륙해 이동병원 역할을 했다. 


레이더와 탐지를 피해 선회비행을 하느라 8시간이 걸린 허큘레스는 화물칸 문을 연 채로 저녁 11시 1분에 엔테베에 착륙했다. 첫 번째 수송기가 멈추기도 전에 진짜처럼 위장한 대통령 경호 모터사이클이 활주로에 내려 터미널로 향했다. 그러나 두 명의 경계병이 행렬을 멈추려고 했다. 그들은 아민이 검은 색 벤츠를 흰 색으로 바꾼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벤츠에 타고 있던 두 명의 병사가 소음총을 발사했지만 빗나갔고 뒤따르던 랜드 로버에서 AK-47로 그들을 사살했다. 


날카로운 자동소총 발사음이 이스라엘의 작전을 노출시켰지만 어설픈 우간다 병사와 달리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대비는 차원이 달랐다. 이스라엘 업체가 엔테베 터미널을 지었기 때문에 이미 모형건물로 충분히 연습을 해 둔 상태였다. 기습 팀은 차에서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터미널로 진입해 납치범들을 손쓸 틈도 없이 제압했다. 


보병수송차로 활주로를 돌던 다른 팀은 11대의 우간다 공군 Mig-17을 파괴해서 수송기를 추격하지 못하게 했다. 전체 기습작전은 53분이 걸렸고 대부분의 시간은 인질을 태우거나 수송기에 연료를 주입하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45명의 우간다 병사를 사살하고 자신들은 지휘관 한 명만을 잃었다. 기습작전을 이끌었던 요니 네타냐후 중령은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었던 벤자민 네타냐후의 형제였다.

6. 1943년 영국 공군의 독일 댐 공습

루르(Ruhr) 계곡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장이었고 영국은 그 일대를 수장시켜서 나치의 전쟁능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댐은 수 억 갤런의 물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공군은 이 댐들을 터뜨려서 계곡을 호수로 만들고 싶었다.


댐 폭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터운 댐의 벽면에 폭탄을 투하해봤자 겉에만 상처를 내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내려가서 그 효과를 최대한 낼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은 것이, 이미 수면에는 어뢰를 막는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면 아래까지 내려가 댐 기초부분에서 터질 폭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빅커스 항공사업부의 영국인 공학자 반스 월리스는 ‘물 수제비(Bouncing Bomb)’라고 불리며 주로 댐 공격에 사용될 폭탄을 개발해냈다. 커다란 드럼통 모양의 폭탄은 랭카스터 4발 엔진 폭격기에 한 발씩 장착되었다. 비행기 안에 특수하게 장착된 모터와 벨트 구동장치는 목표물에 다가가는 동안 분 당 500회전의 속도로 폭탄을 회전시키다가 수면 위 60m 정도에서 투하할 때에는 분당 240회전까지 속도가 높아진다. 폭탄은 수면 높이에서 몇 번 튀기다가 댐을 만나면 회전력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 최대 수심의 압력에서 퓨즈를 동작시켰다.

1943년 5월 16~17일 밤, 영국 저수지에서 두 달 동안 훈련을 받은 19대의 랭카스터 폭격기가 3개 그룹으로 나뉘어 출발하며 ‘징벌’ 작전을 시작했다. 한 그룹은 메네(Mohne)와 에데르(Eder) 댐을 공격하고, 두 번째 그룹은 조르페(Sorpe) 댐을, 세 번째 그룹은 대비용 저수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폭격수들을 단순하지만 대단한 성능을 가진 광학장비를 통해 정확한 고도와 거리에서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거대한 폭격기는 저공 비행을 했다. 한 대는 바다 수면과 부딪쳐서 폭탄을 잃어버렸고 다른 한 대는 숲을 날다가 나무 위를 긁어서 화재가 났다, 


일단 목표물에 도착한 폭격기 그룹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메네 댐에 투하된 3개의 폭탄 중 세 번째 것이 댐에 구멍을 냈다. 에데르 댐을 폭격한 폭격기는 3번을 공격한 후에 구멍을 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조르페 댐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다른 작은 댐들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영국 공군은 8대의 폭격기와 56명의 승무원을 잃었고 지상에서는 1,600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그 중 1,000명은 외국 노동자였다. 반경 80km에 있던 마을들이 수장되었고 석탄 탄광이 매몰됐다. 그리고 다리가 파괴되고 공장도 무너졌다. 독일은 귀중한 루르 공장지대를 원상복구시키는 데만 4개월이나 허비해야 했다. 징벌 작전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2차 대전 폭격 중에서 가장 전문적이고 기발한 기습으로 손꼽히고 있다.

7. 1863년 그리어슨의 미시시피 기습 작전

남북전쟁 개전 초기만 해도 북군 기병대는 '똑똑한 바보'로 불렸다. 남부 기병대는 어릴 때부터 말을 타며 사냥하고 놀았던 반면에 북군 기병대는 소를 움직이는 카우보이가 고작이었다. 오명을 뒤집어 쓴 북군 기병대였지만 남북전쟁 기간 중 벌어진 기병작전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북군 제16군 군단의 제1기병사단, 제1기병여단이 만들어 냈다.


더 황당한 것은 지휘관이었던 벤자민 그리어슨(Benjamin Grierson) 대령으로 그는 전쟁이 터지기 전엔 음악선생님이었고 어릴 때 말에 걷어차인 기억 때문에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 사람이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리어슨은 서점에서 구입한 훈련 매뉴얼을 읽고 기병을 지휘했다.

1863년 초반만 해도 전쟁의 승패는 불분명했지만 링컨 대통령은 북군이 미시시피 강만 장악한다면 남부를 둘로 갈라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시시피 강 장악은 당시 '남군의 지브랄타'로 불리던 빅스버그에 달려 있었는데, 이 도시는 200m 높이의 절벽이 가로 막고 있어서 정면공격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병력을 집결시키는 동안 어떻게 남군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릴 수 있었을까?


바로 이것이 그리어슨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그는 1,700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남군의 후방을 돌아다니며 전신선을 끊고 철로를 부수고 보급품을 불태우고 농장을 약탈하고 군과 정부 건물을 불태우고 남부 시민을 몰아내는 등 남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그 어려운 임무를 완벽하게 해냈다. 


1863년 4월 17일, 하사 스테판 포브스에 따르면 "여단은 거대한 뱀처럼 미시시피 숲 지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6일 후, 북군 뱀은 950km 이상을 미끄러져 다니며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남군 수비선을 뚫어 배턴 루지(Baton Rouge)까지 침투했다. 


남군은 그 당시 그리어슨을 잡기 위해 20,000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습격 마지막 날까지도 그에게 상처하나 내지 못했고 그리어슨은 4번의 교전을 끝으로 무사히 본대로 돌아갔다.

그리어슨의 기병대는 100km 정도의 철로와 전신선을 끊었고 보급품을 가득 실은 기차와 수 톤에 달하는 소화기와 탄약을 불태웠고 100명의 남군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고 500명의 포로와 1,000 마리의 말과 나귀를 노획했다. 이 와중에 그리어슨 기병대에서 전사한 병사는 고작 26명뿐이었다.


남군 군복을 입은 그리어슨의 선봉대가 정보를 모으면 나머지 본대는 당시의 전쟁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필요한 식량만 취하고 남군에게 들어갈 여지가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지만 민간인 약탈이나 살인은 금지했다. 기차를 불태우기 전에는 먼저 탑승객이 짐을 가지고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한 후에 불태웠고 습격 과정에서 민가에 불이 옮겨 붙으면 함께 불을 끄기도 했다. 


그리어슨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습격군에 정신을 빼앗긴 남군은, 북군 그랜트가 23,000명을 미시시피 강 건너로 도강하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그랜트가 빅스버그를 포위하고 북쪽에서는 셔먼이 포격을 가하면서, 빅스버그는 1863년 7월 4일에 함락되었다. 


빅스버그 함락과 리 장군의 게티스버그 전투 패배는 남북전쟁의 종전을 예고했다. 그랜트, 셔먼과 리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데, 그리어슨 역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지휘관이었다.

* 외부 필진 우에스기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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