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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 비판한 학자에게 벌어진 일

일제의 ‘교육칙어’ 비슷한 이념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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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교부는 국민교육헌장독본 265만 부를 발간해 각 학교와 기관에 배부했다.

출처ⓒ한밭교육박물관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권은 ‘국민교육헌장’(아래 헌장)을 제정해 선포했다. 1968년 6월 박정희가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 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교육장전을 제정하라고 지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박종홍·안호상 등의 철학자, 사학자, 교육학자들이 작성한 헌장의 초안은 그해 11월 26일에 국회에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 이날 선포된 것이었다. 당대의 ‘교육지표’가 담긴 전문 393자(이 글자 수는 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의 헌장은 이후 각급 학교 교과서 첫머리에 인쇄되는 등 새마을운동과 함께 20여 년간 계속 보급됐다.


그해 나는 당시의 ‘국민학교’ 졸업반이었다. 치열한 입시를 거쳐 중학교에 진학하던 시기여서 우리는 일과를 마치고 밤에도 교실에 남포등을 걸어놓고 ‘과외수업’을 해야 했다. (이듬해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무시험 입학제, 이른바 중학교 평준화가 시작됐다.) 


우리가 이 ‘헌장’ 소식을 들은 것은 12월 말, 방학이 다 돼서였을 것이다. 헌장이 선포된 12월 초에는 중학교 전기 입학시험이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글쎄, 기억은 희미하지만, 우리가 헌장을 암송하라는 과제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일정상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 국민교육헌장 선포 후 시가행진

출처ⓒ전라북도 교육청 기록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헌장의 앞머리 두어 문단은 나는 금방 외워 버렸다. 그러나 곧 방학이 시작됐고 이듬해에 졸업했기 때문에 우리는 헌장 암기의 과제로부터 멀어졌다. 헌장을 암기하지 못한 후배들이 체벌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별로 실감하지 못했던 까닭이 거기 있었다.

'국민교육헌장'과 일제의 '교육칙어'

진학한 도회의 중학교에서도 헌장을 암기하라는 요구는 따로 없었다. 매년 12월 5일 선포일에 기념식을 치른 게 고작이었다. 무심히 외웠던 헌장의 첫 두 문장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새 필기구를 시험할 때마다 끼적대는 내용이 늘 그것들이었다.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타자 연습을 할 때도 그건 꽤 쓸모가 있었다.


워낙 어렸던 탓이기도 했지만, 헌장의 내용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태어나면서까지 ‘웬 역사적 사명’ 타령인가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지, 그게 메이지 시대의 군국주의적, 국수주의적인 ‘교육칙어’(1890∼1948)와 비슷한 이념과 집단주의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비판을 확인하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이었다.

교육칙어는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가 국민에게 직접 분부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칙어는 먼저 역대 천황이 국가와 도덕을 확립했다고 밝히고 국민의 충성심과 효도심이 ‘국체의 정화’이자 ‘교육의 근원’임을 규정했다.


거기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부부 사이의 조화, 형제애 등과 학문의 중요성, 준법정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나 나라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노력하라는 등의 12가지 덕목이 명기돼 있다.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국민의 전통임을 밝히고 이는 역대 천황의 유지이므로 국민뿐 아니라 천황 자신도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끝을 맺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에는 ‘근대 산업화’와 함께 ‘개인’이 아닌 ‘국민으로서의 인간’을 천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주독립’과 ‘인류 공영’, ‘창조와 개척’과 ‘경애와 신의’, ‘자유와 권리’와 ‘책임과 의무’, ‘나의 발전’과 ‘나라의 발전’, ‘반공’과 ‘민주’ 등 상이하고 때로 상호 대립하거나 모순될 수도 있는 가치가 혼재된 채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덕목들은 문맥상으론 아무 모순 없이 제시되면서 박정희가 일관되게 제시한 사상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라는 문장이었다.

▲ 전남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우리의 교육지표’ 기념비

이런저런 비판이 없진 않았지만, 헌장이 국민 대중들에게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독재체제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국가주의적 교육사상’이라며 국민교육헌장을 강력하게 비판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을 통해서였다.


헌장이 선포된 지 꼭 10년만인 1978년, 송기숙 등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면서 그것이 ‘유신독재의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민주교육을 선언한 것이었다.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 송기숙 전남대 교수

선언 이후 이들 양심적 학자들은 모두 대학에서 쫓겨났고 송기숙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전남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와 농성이 이어지자 당국은 학내에 경찰을 투입했고 휴교령으로 대응했다.


자율성은 물론이거니와 민주적 교육풍토마저 사라져 버린 당시 대학사회에서 교육지표 사건은 유신독재의 반민주적인 교육 실상을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청년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질수록 학원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강화됐고, 이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로 인한 유혈시위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구속과 제적 등 대량 학사징계가 뒤따르고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도 노골화됐다. 


그러나 물리적 폭압만으로는 민주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유신독재는 1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시해됨으로써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유신의 종말은 ‘한국적 민주주의’라 포장된 유례없는 폭압 체제의 붕괴였고, 국가주의적 가치의 쇠퇴를 의미했다. 


국민교육과 정신을 획일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던 국민교육헌장은 사회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빛이 바래어갔다. 이런저런 비판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93년까지는 기념식 등 행사가 이어졌지만, 이듬해인 1994년부터는 그조차 폐지됐다. 


그예 헌장은 초중고의 교과서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2003년 11월 27일에는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도 폐지되면서 국민교육헌장은 개발독재 시대의 초상으로서 그 명운을 다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교육 방침을 담아 1890년에 반포된 일제의 교육칙어는 패전 후 1948년에 폐지됐다. 그런데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20년도 뒤에 그 이념을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해 무려 4반세기 동안 이 나라 교육의 준거로 삼았으니 그 역사적 퇴행 앞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긴 정작 식민종주국 일본은 1947년에 ‘황국신민’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했던 ‘국민학교’를 버리고 ‘소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무려 50년이 넘게 ‘국민학교’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무감각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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