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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절, 한 잡지사가 정권 풍자했다 겪은 일

일명 ‘오적필화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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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계>의 마지막 호가 되어버린 1970년 5월호

1970년 9월 29일 박정희 정권의 문화공보부는 5, 6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는 비판적 월간 종합지였던 <사상계>의 등록을 취소했다. 이로써 1953년 4월 장준하(1918~1975)가 문교부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해 창간한 이래 남북통일과 노동자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를 과감히 다루며 식자층으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끌었던 <사상계>는 폐간됐다.

「오적」 필화, <사상계> 등록취소

<사상계>의 등록취소는 ‘등록 시의 인쇄인과 실제 인쇄인이 다르다’며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독재에 비판적 논조로 일관해 오면서 권력에 미운털이 박혔던 이 잡지가 5월호에 김지하(1941~ )의 담시 「오적」을 실은 이래 이어진 탄압과 필화의 종착점이었다. 필화란 언론 등이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처벌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것을 말한다.(출처: 위키백과)

“그것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입을 꿰매도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은 터져 나오는 법이다.”

- 김승균, 당시 <사상계> 편집인

김지하의 「오적」은 부패한 한국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늑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등 오적에 비유해 적나라하게 풍자한 담시였다. 시인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등 특수 계층을 도적으로 빗대며 이들의 부정부패를 걸쭉한 판소리 형식으로 비판한 것이다.

특히 시인은 그해 3월 17일의 ‘3·1 고가도로 정인숙(당시 국무총리 정일권의 아이를 낳은 고급 요정 종업원)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4월 8일의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 1970년 7월 7일 오전 서울형사지법은 「오적」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김지하 시인 등 4인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회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로 시작되는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 동빙고동에 모여 ‘황금 십만 근을 걸어놓고’ 벌이는 도둑 시합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오적’과 그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이 결탁해 ‘오적’을 고변한 힘없는 백성을 오히려 잡아 가뒀으나 결국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날벼락을 맞아 죽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담시 「오적」,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 풍자

▲<오적>(동광출판사, 1987)

「오적」은 김지하가 처음 시도한 담시(이야기 시)다. 일반 서정시보다는 길고 단편보다 짧은 독특한 형태로 판소리의 운율을 빌린 형식이었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여 장 분량으로 <사상계>에 18쪽에 걸쳐 게재됐다.

이 한 편의 시에 정권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상황은 <사상계>의 시판을 중단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이 6월 1일 자에 「오적」을 재수록하면서 문제가 됐다. 다음날 새벽 중앙정보부와 경찰들이 <민주전선> 10만여 부를 압수했고 김지하와 <사상계> 대표 부완혁, 편집인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검찰은 ‘계급의식 고취 목적의 시작(詩作)’이라며 유죄를 주장했고 김지하는 “내 시를 자꾸 용공이라고 하는데 부정부패가 ‘이적’이 될지는 몰라도 이를 비판하는 소리가 ‘이적’이 될 수는 없다”라고 맞섰다. 검찰이 공소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시 「오적」을 읽기 시작하자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피고인들은 9월 8일 전원 보석으로 석방됐는데 김지하를 제외한 세 명에 대해 법원은 유죄를 인정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건강상의 문제로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던 김지하는 4년 후 민청학련 사건 때에 ‘오적’ 사건도 병합 심리를 받게 된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4개월 동안 투옥됐던 김지하는 결국 10년 후인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체포됐다. 유신 체제하의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르트르·보부아르 등이 참여한 세계적 구명운동으로 무기로 감형됐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그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다시 구속돼 무기징역에 징역 7년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독재자 박정희와 저항시인 김지하의 악연은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그가 석방되면서 끝나지만, 정작 박정희는 그 전해인 1979년 심복의 총을 맞아 비명횡사한 뒤였다.

▲ <사상계>는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 남북통일, 노동 등에서 진보적인 글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장준하가 1953년 4월 창간한 비판적 지성지 <사상계>는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 남북통일, 노동 등의 분야에서 자유와 진보에 입각한 깊이 있는 글을 실으면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독재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진보적 지식인은 물론 “사상계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대학생이 아니다”고 할 정도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사상계>의 필화, 그리고 현재

창간 무렵의 판매 부수는 3천 부 정도였지만, 1955년 12월호로 1만 부를 넘기고 1960년대를 전후해서는 5~8만 부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는 당시 잡지 시장으로서는 경이로운 판매 부수였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가 주는 역사적 교훈” 같은 글은 독자 대중들의 억눌린 표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이 됐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이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인 것이다. 일본 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그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는 될 것이 없지 않은가.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은 아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듯이 이승만도 국민을 다 버리고 민중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 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을 간 것이다.

밤이 깊도록 서울은 절대 아니 버린다고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저희끼리만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난 간 건 아니다.”

최고 존엄(?)을 여지없이 깔아뭉개 버린 이 글이 필화로 이어진 것은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는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지만, 검찰은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에 오연히 맞섰지만, 장준하는 근본적으로 우파 반공주의자였다. 장면 정권의 혼란에 실망한 <사상계>가 5·16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결국은 정권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64년 무렵 <사상계>는 장준하의 기고문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치는 공개장’으로 다시 필화를 겪어야 했다.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이로 인한 광고 취소, 판매량 감소 등이 겹치면서 <사상계>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시달렸다.

장준하가 정계로 진출(1967)하면서 부완혁이 인수한 <사상계>가 세 번째 필화, 「오적」 사건으로 폐간되면서 진보 정론을 펴는 잡지는 맥이 끊어졌다. 「오적」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는 3천만 원을 주고 잡지의 소유권을 가져가려 했지만, 부완혁은 “사형당하는 것보다 안락사시키는 게 낫겠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사상계>는 1972년 대법원의 등록취소청구소송 확정 판결로 승소하지만, 정치적 타격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휴간을 계속하다 마침내 폐간되고 말았다.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는 결국 1970년 5월 「오적」이 실린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오적 필화사건’은 박정희 독재 시기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 권위주의적 통치 따위를 마치 미니어처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준하와 박정희, 두 숙적의 죽음

<사상계> 폐간 5년 후 유신독재로 치닫고 있던 박정희와 맞섰던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당시 정권은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현재에도 그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 김지하(근년)

출처ⓒ연합뉴스

6, 70년대에 걸쳐 박정희와 악연을 이어갔던 시인 김지하는 유신정권 아래서 사형수가 되면서 세계적 저항 시인의 지위에 올랐다. 70년대의 마지막 해에 종신 집권을 꿈꾸던 독재자는 비명에 죽었지만, 김지하는 이듬해 연말에야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70년대를 대표했던 세계적 저항시인 김지하는 90년대 초반 당시의 반독재투쟁을 ‘죽음의 굿판’이라 폄훼하면서 구설수에 오른 이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대선에서 자신을 박해했던 당대 권력자의 딸을 정치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면서 그는 마침내 노추를 비켜 가지 못하는 ‘독거노인’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광석의 목소리로 김지하의 시로 붙인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를 듣는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0년 「오적」으로 구속됐던 스물아홉 살의 김지하, 그 젊음과 열정, 초심의 시간과 현재의 간극을 우울하게 상상해 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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