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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 임기' 최규하 대통령이 '허수아비 대통령'이라 불린 이유

조회수 2019. 8. 19.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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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10일 만에 '허수아비 옷'을 스스로 벗었다.
▲ 1980년 8월 18일 청와대에 떠나면서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최규하 대통령 내외. 그의 재임 기간은 8개월 10일이었다.

1980년 8월 18일 오전 10시 제10대 대통령 최규하(1919~2006)는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재임 8개월 10일 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임 이유를 “지난봄 학생들의 소요와 광주사태에 대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정치 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해 왔고 역사적 전환기에 임기 전이라도 사임함으로써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겨 정치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규하, 허수아비 옷을 벗다

정작 쿠데타를 감행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학생들의 소요를 일으키고 광주 학살을 자행해 집권 기반을 다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손을 털고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먼 허수아비 권력이 책임을 통감하고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위해 사임한다는 것이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자진 사임이었지만 그가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밀려난 것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이미 박정희 피살 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과 5·17 조치 등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신군부 세력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무력화시키자 최규하는 헌법 개정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중도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 최규하 (1919~2006)

1979년 10월 26일 전임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된 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11월 6일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이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한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최규하의 담화에 대해 재야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하고 이른 시일 내에 선거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재야와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는 경찰력으로 대응했다. 


당시 헌법 때문에 야권의 입후보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최규하는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했다.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96.7%(2,465표)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종신 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겐 마침맞은 선거제도였지만, 허수아비 권력엔 득표율조차 희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고 꼭 엿새 후에 전두환 일당은 12·12 쿠데타를 감행해 권력을 장악한다. 이듬해까지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민주화 열망,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막을 내린다. 5·18 광주 학살은 바로 그러한 비극의 정점이었다.

짓밟힌 ‘서울의 봄’

필경 대통령에 당선됐어도 최규하는 자신의 권력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임기(1984년 12월 26일까지)를 채우는 것 역시 언감생심이었다.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나 8개월 만에 사임함으로써 최규하는 마침내 대한민국 역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 ‘서울의 봄’은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다. 5월 18일 이전, 계엄령 반대 시위에 나선 광주시민들의 모습

최규하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최규하는 공직생활 중에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 자기 파벌을 형성하지 못해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그게 그를 8개월짜리라도 대통령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권력에서 밀려나게 한 조건인 양날의 칼인 셈이었다.


최규하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1937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2월 만주 국립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했다.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힌다.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군정에 발탁됐고 정부 수립 후 농림부를 거쳐 외무부로 옮겨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외무부 장관을 거쳐 유엔총회 수석대표,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했고 1976년에 국무총리에 올랐다. 


1979년에 국무총리로 다시 선출됐다. 그는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말단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관료로서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게 그의 생애에 영광이 되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 최규하는 1980년 4월, 신군부의 강요에 따라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이미 실권은 신군부에 넘어가 있었으니 그에게 얼마만 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겐 ‘서울의 봄’을 민주화의 동력으로 삼아 역사적 전환기를 주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신군부의 강요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고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그러나 그에겐 실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내각에서조차 뜻을 제시하지 못했고 내각이 구성된 지 두 달가량이 지날 즈음부터 청와대에서 장관들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어졌을 정도였다. 


실권은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이 농단하고 있었다. 8월 5일 자신을 총애해 준 박정희에게 배운 대로 그는 대장으로 승진한 후 8월 22일 전역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규하의 하야 과정에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압력을 넣었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된 듯하다. 그 자신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했지만, 당시 정치권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신군부 세력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최규하에게 사임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은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하고 12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희비극의 시작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장충체육관에서 전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1년 3월 5공 헌법에 따라 체육관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다. 6월항쟁과 전 국민의 민주화 요구 앞에 이들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최규하의 반역사적 진술 거부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백담사에서 은거해야 했고 국회 5공 청문회에 서야 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구속기소 돼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에 사면됐다.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지만, 최규하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피해자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로서 동정표를 전혀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12·12나 5·18에 대한 증언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권력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규하는 진술을 거부하는 이유로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숱한 증언과 고백 요구에 일관되게 침묵했고 면담 거절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신의 수치를 넘지 못하고 뒤틀린 역사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기회를 깡그리 거부한 것이었다. 


최규하는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 자신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해 논란이 있었는데 그게 그가 대통령으로서 누린 유일한 호사였는지도 모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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