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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으로 일본 몰아내자’ 일본 패망으로 무산된 ‘독수리 작전’

미국과 연합한 국내 진공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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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그러나 무산된 ‘독수리 작전’

▲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을 듣고 광화문에 운집해 만세를 부르는 민중들

역사에서 가정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일인가. 소련이 한 주일쯤이라도 늦게 대일본 선전포고(1945.8.8.)를 했더라면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8.6.)가 한 주일쯤 일렀더라면… 안타까운 것은 장준하 선생 등이 광복군 장교로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CIA의 전신) 훈련을 받고 참여한 국내 진공 작전이 무산된 점이다.


장준하(1918~1975), 김준엽(1920~2011, 전 고려대 총장) 등이 1944년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배속된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 장준하는 학병을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해방 직전, 임정과 김구 주석은 미국에 제주도 점령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승리를 얻는 일은 해방 이후 임정과 광복군의 위상과 관련해 매우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임정은 끈질긴 노력 끝에 미 전략사무국(OSS)과의 연합 작전에 합의한다.


이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계획을 세운 미국과 미군과 함께 한국과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을 진행한 뒤 한국으로 진입한다는 ‘한국광복군 건군반작전계획’을 수립한 임정 군무부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광복군 제2 지대장 이범석은 미 제14 항공군 사령관 셴놀트(Claire L. Chennault) 소장에게 광복군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고 미국은 이를 반겨 우선 한국인 공작반을 설치해 일본문서 번역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제3 지대장 김학규도 독자적으로 셴놀트 소장과 OSS와 접촉해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6개 항의 원칙에 합의했다. 이는 미국이 광복군에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고 광복군은 대일전 필요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김구 주석은 김학규와 OSS가 합의한 6개 항 원칙을 승인했고 4월 17일에는 양측의 정식 협정이 체결됐다. 훈련은 제2지대와 제3지대를 대상으로, 산시성 시안시 외곽 두취와 안후이성 푸양시 리황에서 각각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훈련은 일본의 항복으로 제2지대에서만 이뤄졌다. 


제2 지대는 125명을 선발하고 기수를 나눠 훈련을 시작했는데 훈련은 정보수집을 위한 첩보교육에 중점을 두고 매일 8시간씩 이뤄졌다. 1기생 훈련이 완료된 때는 1945년 8월 4일 교육과정을 통과한 인원은 38명이었다. 


국내 침투 작전은 제2 지대 1기생 38명이 훈련을 마친 시점부터 구체화 되어 8월 7일에는 김구 주석과 지청천 광복군 사령관, 이범석 제2 지대장과 OSS 책임자들이 회의를 거쳐 공동작전 수행을 선언했다.

▲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학병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광복군은 OSS와 국내정진군 공작반을 편성했고 침투 계획은 OSS의 훈련 교관인 쿠퍼(Chester Cooper)가 맡았다. 총사령관 지청천, 제2 지대장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비행대까지 편성했고 8월 13일이 한국 후방 상륙 D-데이로 예정돼 있었으나 8월 9일 일본이 항복을 인정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진공 작전 준비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 작전의 이름은 마치 영화 같다. ‘독수리 작전’. 광복군 중위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 김준엽 등과 함께 이 훈련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6일 국내정진군을 출발시켜 이틀 후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준하 등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로 8월 19일 중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장준하는 석 달이 지나서야(11.23.)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는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의 무산이 바로 미군이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등의 정치적 상황으로 전개됐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시안성에 들어가 성 주석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이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의 실망은 대단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山東角]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은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돌베개, 2014)

한편, 2001년 4월 비밀 해제된 미군의 일급비밀 문서에서 밝혀진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는 OSS와 또 다른 연합 작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카탈리나섬에서도 한반도 진공을 목표로 한인 요원들이 비밀 군사 훈련을 받았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는 바로 이 훈련에 참여했던 박순동이란 이를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다.

▲ OSS 요원들과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앞줄 가운데)

출처©장준하기념사업회

해방 이후 역사의 전개에서 장준하의 삶은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반독재 투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굴욕적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 투쟁 이후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재야세력을 이끌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에 의해 체포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5년 1월 8일 ‘박정희 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면서 민주 헌정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그해 8월, 의문의 죽음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향년 쉰일곱.

민족주의자의 길

▲ 군복 입은 박정희(1917~1979

고 성내운(1926~1989) 교수의 육성으로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을 다시 듣는다. 공교롭게도 선생은 8월에 나서(1918. 8. 27) 8월에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75.8.17)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조차 ‘조사 불가능’(2004)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2012년 묘지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면서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이를 타살의 증거로 발표한 바 있었다.


광복군 출신의 이 열정적 민족주의자가 맞서 싸웠던 일본군 장교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1917~1979)는 거의 동년배인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도올 김용옥은 “장준하는 사선을 뚫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투사이며 반체제의 선봉, 박정희는 대일본제국의 육군 장교였고 여수·순천 항명 사건의 굴절을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민족주의자의 길’은 장준하의 통일관을 압축해 놓았다. 국회에서 ‘통일이 국시’라는 발언으로 야당 국회의원이 제명되고 구속된 때가 1986년이다.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는 “그것이 민족사의 발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할 때엔 그것은 거짓 명분이요, 진실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통일은 36년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이 싸워 온 질곡의 세월을 딛고 선 ‘해방의 완성’이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그어진 아픔의 경계를 넘어 통일로 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해방을 새롭게 만나게 되리라.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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