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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의 유신 몰락 앞당긴 노동자들의 정체

유신정권은 농성하는 노동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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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노동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전환해 여론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1979년 오늘인 8월 9일,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 187명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당사에 들어갔고 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 신민당과 총재 김영삼은 당사에 들어간 노동자들을 반기면서 이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1966년 자본금 100만 원에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가발 수출업체 YH무역은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 종업원이 최대 4천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설립자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는 한편,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회사의 일방적 폐업에 농성 돌입한 노동자들

그러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 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4월 폐업을 선언했다. 1979년 8월 6일 회사는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 경찰은 1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민당사에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노동조합(1975년 결성)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하는 한편, 회사 측과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 관계기관에 회사 정상화를 호소했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고 회사는 마침내 기숙사와 식당까지 폐쇄했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8월 9일 새벽, 187명의 노동자는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의 당사 농성은 언론 보도로 여론화됐고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지지와 방문이 이뤄졌다. 


이튿날, 신민당은 국회 보사위원회 소집을 요구했으나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김영삼 총재는 당사를 포위한 경찰의 철수를 요청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경찰은 11일 새벽 2시 병력 1천여 명을 당사에 진입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경찰폭력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사망

당사로 진입한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취재하던 기자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원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 YH 사건 때 희생된 고 김경숙

경찰은 이에 대해 고인이 “(진압) 작전 개시 30분 전 스스로 동맥을 끊고 4층 강당 건물 뒤편 주차장 쪽 창문 아래로 투신자살했다”고 밝혔다. 노조는 이를 부인하면서 타살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민당사와 회사 기숙사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가 8월 13일 회사로부터 퇴직금과 7·8월 임금을 지급 받았다. 노동자들은 애초 회사가 약속한 상여금, 월차수당, 8개월분의 해고수당을 주지 않자 항의를 했지만, 경찰이 마련한 버스로 강제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 최순영 지부장 등 노조 간부 4명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한국사회선교협의회 문동환, 서경석 목사, 고려대 해직 교수 이문영, 시인 고은 등을 ‘국가보위법’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했다.

▲ YH무역 노동조합이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할 수 있게 지원한 도시산업선교회. 오른쪽이 인명진 목사다.

신민당은 노동 탄압과 경찰의 국회의원 폭행, 야당 파괴 공작 등을 비판하고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도 YH무역 노동자, 목사, 지식인 등의 구속에 항의했다. 정부는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종교 단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산업체 등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설치하고 기업체 실태를 조사했다.


경찰은 YH 사건을 불신분자들이 도시산업선교회의 사주로 저지른 용공 행위, 즉 좌익세력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이들 조사가 도시산업선교회의 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한 마녀사냥 식으로 진행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외부 노동 지원 단체와의 사전계획에 의해 노동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전환해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비록 사흘 만에 강제 해산됐지만, 이후 이 사건의 전개과정을 통해 그것은 일정하게 관철됐다. 

김영삼 제명, 부마항쟁 거쳐 박정희 피살로

YH 사건은 신민당 의원들의 항의 농성과 종교계와 언론인, 해직 교수와 문인, 청년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10월 4일, 여당의 주도로 국회에서 김영삼 징계동의안이 통과돼 제명되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는 사태로 비화했다.


이런 억압적 정치, 사회적 분위기뿐 아니라 경제 위기로 인한 부도 기업 속출하는 등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10월 16일 부마항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열흘 후, 종신 집권을 꿈꾸었던 절대 권력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심복 김재규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YH무역 여성 노동자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은 정부의 노동자 억압을 통한 1970년대 경제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외형적 지표는 성장하고 재벌과 부자들은 급속히 부를 늘렸지만, 정작 생산 주체인 노동자와 농민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희생됐다. 


박정희가 개발 독재로 얻은 과실은 노동자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한 채 빈부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제조업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 상승은 매우 느렸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의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시급은 커피 한 잔 값에 지나지 않았는데 9년이 지난 1979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시급 수준도 다르지 않았다.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 알 수가 없습니다. (…)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

YH무역 노동자 투쟁은 유신체제의 억압적 노동 통제가 노동자계급의 노동기본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보편적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발전했다. 이 제조업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김영삼 제명 파동과 부마항쟁, 10·26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경찰의 농성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뒤 투신자살로 발표된 노조 대의원 김경숙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9년이 걸렸다. 2008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79년의 김경숙 사망 사건에 대해서 “당시 경찰이 투신자살이라고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했고 당시 발표 내용도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힌 것이다.

2008년 김경숙 명예 회복

경찰은 ‘(진압) 작전 개시 30분 전 스스로 동맥을 끊고 4층 강당 건물 뒤편 주차장 쪽 창문 아래로 투신자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기록 등을 조사한 결과, 김씨의 사체에는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었다. 경찰의 ‘부검의뢰서’에는 추락시간이 강제해산 작전 개시 이후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에 따라 “국가는 YH 노조 김경숙씨 사망 관련 조작 의혹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김씨의 가족과 YH 노조 여성노동자 및 폭행피해자 등에 사과하고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 1979년 8월 28일, 마포 신민당사 뜰에서 베풀어진 김경숙 추도식. 야당과 재야인사, 노동자들도 참석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만 했던, ‘진주난봉가’를 썩 잘 부르던 노조 대의원 김경숙은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살아 있으면 쉰아홉 살의 중년이 됐을 것이다.


YH무역 노조 지부장으로 사건 직후 구속됐던 최순영은 노조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가발공장을 차렸을 거라는 가발망을 짜는 전문 기술자였다. 여러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회사로부터 하도급 공장을 주겠다는 등의 회유를 받았던 그는 결국 노조를 선택했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은 뒤에 풀려난 최순영은 ‘김경숙추모사업회’를 주도하면서 여성 노동자와 저소득층 여성을 위해 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이후 여성노동자, 환경, 자치 운동가로 일한 최순영은 경기도 부천시 시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 1979년 YH무역 노동조합의 지부장과 부지부장이었던 최순영(왼쪽)과 권순갑

출처ⓒ인권위원회 웹진

“경숙이는 떠났지만 동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최순영에게 김경숙과 그를 떠나 보내야 했던 세월은 아픔이고 서러움이었을 터다. 그러나 1970년 전태일을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9년 뒤의 김경숙도 마찬가지의 아픔이고 부끄러움이다. 


2017년 현재 최저임금은 시급 6,470원이다. 커피 한 잔 값이었던 1970년과 1979년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그로부터 38년, 47년 후의 노동자들의 삶은 그 시절의 그것보다 얼마나 나은가를 씁쓸하게 자문해 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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