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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도 표정도 없었던 한국전쟁 정전협정 순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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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의 정전회담 조인식. 왼쪽 책상에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출처ⓒNARA
1129일의 총성 멈추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제159차 본 회의장인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 일행과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 일행이 마주 앉아 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쌍방 수석대표가 각각 서명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3년 1개월 2일, 1,129일 만에 공식적으로 멈추는 순간이었다. 양측의 군인 피해가 총 322만, 남북한 민간인 피해 249만, 전재민 수가 천만 명에 이르는 끔찍한 전쟁이 끝나는 순간은 그러나 무감동했다. 양축 대표는 악수도 인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명을 끝내고 퇴장했다. 


3시간 뒤인 이날 오후 1시에 유엔군 기지 안 문산극장에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브리스코 미 극동해군 사령관, 앤더슨 제5공군 사령관, 웨이랜드 극동공군 사령관, 테일러 미8군 사령관, 최덕신 한국군 대표, 그리고 16개국 참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확인 서명을 했다. 


한편 공산 측에선 김일성이 이날 오후 10시에 평양에서, 중공군의 펑더화이가 다음날인 7월 28일 오전 9시 30분에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의 조인 절차가 종료됐다. 이로써 1,129일 동안 이어진 6·25전쟁은 ‘전쟁의 정지’, ‘정전상태’로 들어갔다.

▲ 판문점 휴전회담장의 취재보도진들

출처ⓒ국가기록원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이듬해 중반까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은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되면서 패퇴했다. 이번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한군을 밀어붙였으나 이듬해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른바 1·4후퇴로 퇴각해야 했다.

전쟁의 교착, 휴전협상으로

이후 1951년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서 38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지구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6월 1일 트리그브 리(Trygve Lie) 유엔사무총장은 “만약 38선을 따라 휴전이 이뤄지면 안보리 결의문의 주된 목표가 달성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휴전협상을 공식 제안했다.


더는 전쟁을 확대할 의사가 없었던 미국과 소련 역시 비밀협상을 거쳐 ‘휴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1951년 6월 23일,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 라디오 연설로 교전 당사국들 사이의 휴전과 군병력의 38선 철수를 논의하기 위한 ‘휴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이에 호응해 해임된 맥아더 대신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원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의료선에서 휴전회담을 개최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 덴마크 병원선 유트란디아호에서의 부상병 진료 모습

출처ⓒ국가기록원

이에 공산 측은 바로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대략 6주 정도면 타결될 수 있으리라 봤던 회담은 난항을 거듭했고 의제마다 장기 설전을 벌였다.


양측은 별도의 협의가 없는 한 군사작전은 계속한다고 했기 때문에 회담 기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고, 휴전회담의 추이에 따라 군사작전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주요 전선에서 국지전 형태로 심리적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만이 반복됐다.

만 2년, 각종 회담 끝에 타결

휴전협정 체결까지 38선 주변의 주요 고지를 두고 양측의 쟁탈전이 반복됐다.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이 이때 치러졌다. 주요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을 전개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의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만 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열렸다. 이는 휴전회담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는지를 방증한다.

▲ 유엔, 한국에서의 전투(한국전 유엔군 참전에 대한 책자에 소개된 사진)

출처ⓒ국가기록원

정전 협상 과정의 쟁점은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 외국군 철수 문제, 정전감시위원회 설치 문제, 포로 송환 방식 등이었다. 군사분계선 설정은 유엔군 측은 현 접촉선을, 공산 측은 38선을 제안하는 등 엇갈렸지만 1952년 1월 27일 현재의 접촉선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후 외국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 공산 측은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했으나 유엔군 측은 철군 문제가 정전 협상의 의제가 아니라 ‘정전협정’ 체결 뒤 정치회담의 의제라 주장해 이 안이 받아들여졌다.

포로 송환 문제에 막힌 협상

비무장지대에서 군사 활동을 감시할 군사정전위원회 설치와 관련해 비무장지대는 유엔군 측이 3.2km, 공산 측이 2km로 각각 제의해 4km로 합의했다. 논란 끝에 후방 지역에서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할 중립국 감시위원단 설치도 합의했다. 중립국 감시위원단은 스위스, 스웨덴, 체코, 폴란드 4개 국가로 결정됐다.


▲ 송환 희망여부를 조사받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전쟁기념관‘휴전회담’의 마지막 장애는 ‘포로 송환문제’였다. 가장 쉽게 합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 문제는 양측의 첨예한 대립으로 말미암아 휴전협정 체결을 1년 이상 지연시켰다.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정’(1949)은 정전 후 포로를 지체 없이 석방해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에는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송환 희망여부를 조사받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출처ⓒ전쟁기념관

▲ 휴전협정 원본의 일 부분. 양측의 서명이 보인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1951.2.~1953.7.)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모두 15만 명의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반공과 친공으로 나뉘어 수용소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였다.


반공포로 가운데에는 공산 치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북한군, 중공군도 있었지만, 북한군이 이남을 점령하면서 강제 징집한 의용군 출신 병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는 남한 출신의 젊은이들이었다. 포로의 강제송환은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만만찮은 문제였다. (관련 글: 거제도 수용소의 포로들, 수용소장을 납치하다


2차대전 뒤에 연합국은 ‘국제법’에 따라 송환을 거부하는 소련군 포로들을 강제 송환했고 이들 상당수가 처형돼 심각한 인도주의적 문제가 됐다.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포로가 원할 때만 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결국, 양측은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정전 뒤 정치적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정치회담 이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송환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반공포로들이 강제로 송환될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만 7천 389명의 반공포로를 미국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공산 측이 반발하면서 ‘휴전협정’은 중단됐지만, 결국 양측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휴전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휴전협정 서명을 거부해 한국이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휴전 성립, 비무장지대 설치

한국 정부가 직접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아니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이 한국과 유엔 16개 참전국을 대표해 서명했다는 점에서 한국은 엄연히 휴전협정의 당사국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10시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날 22시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휴전이 성립됐다. 이후 38도선 일대의 분계선을 대신해 ‘임진강 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됐다. 


그리고 다시 66년이 흘렀다. 반세기 가까운 냉전 시대를 거쳐 2000년에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나 한반도 평화를 논의한 이래 2018년에는 판문점선언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여정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 글: 남북 정상, '평화와 통일'을 위한 최초의 악수)

그러나 형식적으로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된 ‘휴전’ 상태다. 언제든지 군사적 도발로 전쟁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 체제의 불안정성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 세 차례에 걸친 북미 협상에서 그 가능성의 일단의 엿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앞날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남북 정상이 발표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서 밝힌 대로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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