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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69년 전 오늘, 미군이 민간인 수 백을 무차별 학살했다

200여 명이 사망한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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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평화공원 위령탑에 새겨진 부조. 피난민들이 쌍굴을 통과해 이동하는 형상을 재현했다.

▲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노근리평화공원의 위령탑. 왼쪽 도로 건너 쌍굴다리가 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미군 제1기갑사단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지역에서 무고한 지역의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미군은 피란을 떠나는 민간인들을 한 데 불러 모은 뒤 비행기 폭격과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이른바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No Gun Ri Massacre)’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이후 충격과 혼란에 빠져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미 24사단 병력이 새로 도착한 1기갑사단에 영동 방어진지를 인계한 것은 7월 22일이었다. 거침없이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에 밀려 미군 1기갑사단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7월 23일 정오 영동읍 주곡리 마을 주민들에게 임계리로 피난하라는 소개 명령을 내린다. 이틀 후 이들은 다시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500∼600명을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유도했다. 26일 미군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피난민들에게 철로를 따라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정오께 노근리 쌍굴다리 근처에서 미군은 피난민들의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상이 없자 미군들은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사라졌다. 얼마 뒤 남쪽 하늘에 비행기 두 대가 나타나 갑자기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과 기총소사는 20여 분간 계속됐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100여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날 오후에 미군은 피난민 400∼500명을 다시 모아 100여m 떨어진 쌍굴다리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7월의 무더위 찜통 같은 굴속에서 생사를 오가야 했다. 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고 물이라도 마시겠다고 밖으로 나간 사람은 모두 사살됐다.

▲ 위령탑 앞의 군상. 사건의 피해자들인 피난민들의 모습이다.

▲ 노근리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작은 연못>(2010)의 스틸. 피난민들이 쌍굴다리에서 절규하고 있다.

출처ⓒ노근리프로덕션

전쟁과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은 이웃이나 친척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본능적 사랑마저도 파괴했다. 생존자 양해찬은 당시 현장의 처절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마을 조남일 씨 부인이 하필이면 그 굴다리에서 둘째 날 애를 낳았어요. 조남일 씨가 부인에게 말하더군요. ‘여기 있으며 죽는다, 탈출해야 한다.’ 부인이 ‘애는 어떡하고요’ 하니까 ‘애를 데리고 가면 가다 울어 미군에게 발각돼 우리 모두 죽는다, 여기 그냥 버려두고 가자’고 해요.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탯줄도 끊지 않은 애를 버려두고 남편과 탈출하더군요. 그걸 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버려진 아이에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쟁은 부부간의 사랑도 파괴하더군요. 부인하고 함께 달아나면 부인 발걸음이 늦어 미군에게 당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부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슬그머니 도망친 남편들이 많았으니까요.”

-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1)-노근리 사건에서 재인용, 통일뉴스

가끔 미군은 굴속의 동정을 살폈고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공포 속에 굴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밤이면 청장년들이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으나 총격에 사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탈출이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미군은 굴다리 앞에서 총을 난사하는 마지막 살육을 저지르고 패주했다. 굴속에 있던 피난민 가운데 절반이 그렇게 죽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피난민들은 구원자로 온 미군의 총에 맞아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관련 기사: 주미 대사도 외면한, 아아 노근리)

소대장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 소설 형식을 빈 정은용의 기록. 개정판

▲ 정은용(1923~2014)

이태 후 전쟁이 끝났지만, 사건은 묻혔다. 유족들은 서슬 푸른 독재정권 치하에 숨을 죽이고 살았다. 노근리 사건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AP통신에서 이를 보도한 뒤부터였다. 이전에도 한겨레와 말 등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AP의 보도 이후 미국의 유수 신문들이 머리기사로 이를 다루자 국내의 주류언론도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학살의 진상은 노근리에서 5살 아들과 2살배기 딸을 잃은 정은용(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대책위원장)이라는 기록자의 끈질긴 노력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부터 미군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해 고희를 넘긴 1994년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펴내어 노근리를 햇볕 속으로 불러냈다.

정은용, ‘노근리의 진실’을 불러내다

이 책이 나온 뒤 오연호 기자(현 오마이뉴스 대표)의 취재로 말 7월호에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후 AP통신 최상훈 기자 등의 탐사보도를 통해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 기자와 취재팀은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 <말>지 오연호 기자의 책

AP통신의 보도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을 지시함으로써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대책반이 구성됐고, 노근리사건 피해자 신고 접수가 시작됐다.


갖가지 증거와 증언이 나오자 미군은 객관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이 사건을 ‘우발적 사고’로 몰아가려 했다. 미국 쪽 조사단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미군은 발포 병사들의 증언 여하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증언에 참여하고자 한 병사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결국, 2001년 1월 한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면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미국 정부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깊은 유감’(deeply regret)을 표명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했으나 조사단이 추정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2004년에는 사건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비극적 희생에 대한 신원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노근리 특별법에 따라 노근리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를 진행했고, 218명을 희생자로 2,170명을 유족으로 최종결정했다. 


앞서 2003년 6월에는 사건의 현장인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됐다.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쌍굴다리 앞 옛 노송초등학교 터를 포함한 부지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증언 등을 담은 평화기념관 등을 건립해 2011년 10월 노근리평화공원의 문을 열었다.

▲ 참혹한 학살의 현장인 노근리에 평화공원이, 평화기념관이 들어선 것은 전쟁의 상처를 평화로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의 표현이다.

▲ 반달을 꿰뚫은 총알과 나비로 전쟁과 평화를 묘사한 조각공원의 조각 작품

▲ 평화기념관의 벽. 희생자들의 명패가 벽 한가득 붙어 있다.

진실, 불평등 한미관계에 막히다

미국은 우리에게 ‘분단’을 포함하긴 했지만, 해방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그 군대는 동족 간의 끔찍한 한국전쟁에 참전해 싸웠다. 우방이었던 미국이 ‘혈맹’이라 불리게 된 사연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희생이 기려지듯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마땅하다.


명백한 전쟁범죄, 학살로 밝혀졌지만, 그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근리의 비극은 특별법과 노근리평화공원 조성으로 얼버무려졌다. 한미 양국이 수혜·시혜 관계로 규정되는 이 불평등 구조 속에서 진실이 햇볕 속으로 드러나는데 무려 반세기 이상이 시간이 필요했다. 

▲ 노근리 쌍굴다리. 등록문화재 59호로 지정됐다. 굴 양옆에 탄환 자국이 페인트로 표시돼 있다.

위령탑 왼쪽 도로 아래에 학살의 현장인 쌍굴다리가 있다. 이 도로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서울 기점 225㎞)에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노근리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해 개근천 위에 세워진 철도 교각이다.


여전히 도로로 쓰이고 있는 쌍굴다리의 양쪽 콘크리트 위에는 탄환 자국을 하얀 페인트로 표시해 두었다.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봉합된 역사의 흔적과도 같았다. 


그 자신 가족을 잃은 피해 유족으로 정은용은 50년 동안 노근리 학살의 진실을 파헤쳐왔다. 그는 일생의 화두였던 ‘학살은 왜 일어났을까? 왜 미군은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로 인민군에 패퇴를 계속한 미군이 겁에 질려 이성을 잃었을 경우, 또는 질이 나쁜 ‘예외적인’ 한 부대였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란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 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와 같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나는 ‘작전’과 ‘복수’가 함께 이뤄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피란민으로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크게 당한 직후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면 피란민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란민 조사를 통해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란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 위 통일뉴스에서 재인용

노근리의 비극이 결국 봉합된 것처럼 피로 맹세한 관계(혈맹)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 관계는 여전히 평등하지 못하다. 모든 비극의 원천은 분단 현실이고 그 극복이 새삼 우리의 역사적 과제라는 사실을 새삼 되씹지 않을 수 없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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