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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도약’의 상징된 50년 전 오늘의 그 사건

어느덧 ‘50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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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56분에 닐 암스트롱은 5억 명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달 표면에 발을 디뎠다.

1969년 7월 20일 오후 4시 18분(이하 미국 시각),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착륙선 이글(Eagle)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1969년 7월 16일 9시 32분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아폴로 11호를 탑재한 새턴 V 로켓이 발사된 지 거의 나흘이 지나서였다.


선장인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은 휴스턴 관제센터에 첫 메시지를 보냈다.

“휴스턴, 여기는 고요의 기지. 이글호는 착륙했다.“ (Houston, Tranquility Base here. The Eagle has landed.)

인류, 마침내 달에 발을 내딛다

긴장하고 있던 관제센터의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들은 즉각 답신을 보냈다.

“당신들이 쓰러져 죽을 뻔한 한 무리의 남자들을 구했다. 우리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You got a bunch of guys about to turn blue, we‘re breathing again.)

착륙 6시간 반 뒤인 10시 56분 닐 암스트롱은 5억이 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는 가운데 달 표면에 발을 디뎠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하나의 큰 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 달 표면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디딘 올드린의 발자국

잠시 후 합류한 착륙선의 조종사 버즈 올드린(Edwin Eugene Aldrin Jr.)은 “장엄한 폐허”(magnificent desolation)라고 외친 뒤 두 사람은 2시간 반 동안 달 표면을 탐험하면서 토양 샘플을 수집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 시간, 사령선의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는 달 궤도를 돌고 있었다.

▲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 왼쪽부터 암스트롱, 콜린스, 올드린

▲ 암스트롱에 이어 버즈 올드린이 사다리를 타고 이글호를 내려오는 모습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우주 탐사 경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하자 미국은 자국을 기술을 추월해 버린 소비에트의 기술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다음날 미국은 우주 과학 위원회를 소집하고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아폴로 11호의 기장

1961년 4월 20일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부통령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에게 현재의 미국 우주 계획의 상태를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존슨은 ‘1966년에서 1967년 사이에 달 착륙을 성공시키는 것이 소비에트에 대해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방안이 될 것’이라 답했다. 1961년 5월 25일 케네디는 미국 의회의 양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폴로 계획을 선포했다.

“우선, 나는 인간이 달에 착륙한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는 계획이 성공한다면 다른 어떤 우주 계획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또한 장기적인 우주 탐사 계획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이를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할 것입니다.”

- 존 F. 케네디, 의회 연설 中, 1961년 5월 25일

케네디가 아폴로 계획을 선언할 당시 미국은 단지 한 명의 우주인이 지구 궤도 선회에 성공했을 뿐 달 탐사에 관해서 기술력이 축적돼 있지 않았다. 심지어 미 항공우주국(NASA) 안에서도 케네디의 이 선언이 달성될 수 있을지 의심할 정도였다.


어찌 됐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함으로써 케네디가 1961년의 연설에서 밝힌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은 달성됐다. 또한, 그것은 소련과의 우주 탐사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 1969년 7월 21일 자 <워싱턴포스트> 표제 ‘이글은 착륙했다. 두 명의 남자가 달 표면을 걸었다’

그러나 그 경쟁에서 우위를 이루기 위해 미국은 아폴로 계획에 250억 달러(현재 화폐 가치로 한화 100조 원에 해당)라는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했다. 1967년 아폴로 1호는 발사 전 훈련 도중에 화재가 발생해 3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었다.

아폴로 계획, 미소의 우주 탐사 경쟁

달 표면을 탐험을 마친 아폴로의 승무원들은 성조기와 희생된 아폴로 1호의 승무원들을 기리는 패치, 이글호의 명판을 두고 지구로 돌아왔다. 명판엔 “여기 지구 행성에서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다. 1969년 7월 우리는 모든 인류를 위해 평화로이 왔다”고 새겨져 있었다. 세 사람은 7월 24일 태평양 하와이 인근 바다를 통해 무사 귀환했다. 


전 세계가 흥분한 가운데 우리 정부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일인 7월 2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왜 우리나라가 아폴로의 달 착륙을 기념해 임시 공휴일로 정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쉬었다. (당시 유엔 미가입국이었던 우리나라는 10월 24일 유엔의 날도 쉬고 있었다.) 


전 세계인들을 흥분시켰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인류 문명사의 한 분수령이 됐지만, 정작 달에 인간을 보낸 유일한 당사국인 미국에서는 ‘달 탐사가 허구이며 조작’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달 착륙 음모론’은 작가 윌리엄 찰스 케이싱(William Charles Kaysing)이 <우리는 달에 가지 않았다(We Never Went to the Moon)>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아폴로는 사실은 달에 가지 않고 세트를 이용해서 촬영한 가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후 이 음모론은 여러 버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달 착륙 음모론을 대중화한 것은 2001년 <폭스TVP>에서 선보인 다큐멘터리 ‘나사 달 착륙의 비밀’이라는 방송이었다. 이 다큐는 지금까지 나온 숱한 달 착륙 관련 음모론을 종합한 데다 학자들의 증언까지 곁들여 매우 흥미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음모론은 매우 정교한 논리로 대중을 설득한다. 그게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미를 위해 제기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물론 이 조작설의 근거는 강력한 반론에 부딪친다. 조작설의 근거는 사진·영상에 관련된 것과 과학·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나뉘었는데 그 설득력이 만만치 않다. 


(사진·영상 관련 근거는 아래 그림 참조 나머지는 위키백과 참조)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이 같은 음모론을 믿는 사람은 미국 인구의 6%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음모론과 관련한 책이나 방송, 영화 따위를 만든 이들 가운데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9·11테러’ 관련 음모론을 다룬 마이클 무어(Michael Francis Moore) 감독의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이나 딜런 에이버리(Dylan Avery)의 <루즈 체인지>(Loose Change, 2006)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된 권력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탄압을 받을지언정 그들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고 어떤 사법적 단죄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음모론, 혹은 표현의 자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나 9·11 테러 관련 음모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글쎄, 그게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지는 몰라도 개연성만으로 음모를 단정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상력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미국 사회가 부럽다.

▲ '911 테러' 관련 음모론을 다룬 다큐영화 <화씨 911>과 <루즈 체인지>

한국 사회는 천안함의 진실과 관련한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다. 보수정당 의원들은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에게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확신을 강요했고 끝내 그 국가관을 문제 삼아 선출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어느 광고에서 보였듯 모두가 ‘예’를 외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존중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민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을 두고도 국론 분열을 부르대는 우리 사회는 언제쯤 그런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50주년을 축하하는 항공 박물관의 표지

7월 20일은 미국이 아폴로 11호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 지 50돌이 되는 날이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군비) 경쟁의 일부였던 우주 탐사경쟁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미국은 3년 뒤인 1972년 쏘아 올린 아폴로 17호가 마지막으로 달 착륙선이었고, 소련도 1976년 루나 24호를 끝으로 달 탐사를 멈추었다. 달 탐사는 들이는 비용에 비겨 그것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우주 탐사경쟁이 불붙은 것은 미국-소련 양자 구도에서 중국과 인도, 일본까지 가세한 다자 구도가 되면서다. 그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나라는 올해 1월, 달 탐사선 창어(嫦娥) 4호를 달 뒷면에 착륙시킨 중국이다. 달 후면은 미국도 디뎌보지 못한 곳이다. 중국은 올 연말에는 달 표면의 표본을 수집해올 창어 5호를 쏘아 올릴 예정이다. 


인도는 2008년에 달 궤도선을 보냈고 올해에는 달 착륙선을 보내려다가 기술적 문제로 취소했다. 일본 역시 달 탐사선을 개발하고 2030년까지 유인 달 탐사선 발사를 목표로 하고 우주 탐사경쟁에 뛰어들었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시절인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우주 탐사경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뒤이어 1966년 무인 달 탐사선을 착륙시켰지만, 이후 유인 착륙에서 미국에 뒤처진 뒤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러시아의 달 탐사 계획은 2029년 달 궤도 비행, 2030년 유인 달 착륙에 시도하는 것이다. 


미국도 다시 달 탐사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미국은 우주인을 다시 달에 착륙시키는 계획을 2024년으로 앞당기고, 2024년까지 달 궤도 우주정거장 ‘게이트웨이’를 만들고, 아르테미스 1호부터 8차례 우주선을 쏠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두 가지 방안을 중심축으로 달 탐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것은 직접 달에 시험용 궤도선과 착륙선을 보내는 방법과 미국이 추진하는 ‘게이트웨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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