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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오늘,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다

1967년 ‘오늘’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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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7월 9일 직썰에 게재된 글입니다.

▲ 동백림 사건은 정권이 부정총선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출처ⓒ경향신문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유학생,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면서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활동을 벌인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른바 동백림(東伯林, 동베를린의 음역 표기) 간첩단 사건이었다.

동백림 간첩단과 6.8 부정선거

특히 이 사건에 연루돼 국내로 송환된 인사 가운데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 인정받던 화가 이응노와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 포함돼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수사 도중 열흘 동안 7차례에 걸쳐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명 예술가들이 낀 간첩단 사건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때는 같은 해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가 개헌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치른 제7대 국회의원 선거(6. 8.) 한 달 뒤였다. 6·8 총선은 공개투표, 대리투표, 표지투표, 무더기 표에다 폭력과 금권이 난무한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정선거로 목표한 의석을 얻었지만,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개하는 6·8 부정선거에 대한 대규모 규탄 시위에 직면해 있었다. 결국, 정부는 6월 16일 기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시위를 원천 봉쇄하려 했다.

▲ 6·8선거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 자 3면

▲ 최악의 부정선거로 공화당이 개헌 가능선을 넘는 156석을 얻자 대대적인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총선 한 달 뒤에 터진 이 국제 간첩단 사건은 당시 정권이 부정 총선 규탄 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간첩으로 지목된 교민과 유학생을 서독에서 납치해 강제로 국내로 송환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단순 접촉을 무리하게 국보법, 간첩죄 적용

이응로는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양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갔다가, 윤이상은 월북한 어릴 적 친구의 아들을 데리고 동베를린에서 그 친구를 만나고 1963년 평양을 방문한 것 등으로 이 사건에 연루돼 체포 송환됐다.

▲ 동백림 사건에는 재불 화가 이응노, 재독 작곡가 윤이상은 물론, 국내의 천상병 시인까지 연루됐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피의자들의 단순한 대북 접촉 및 동조행위까지도 국가보안법과 형법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범위와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다. 또 수사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신체적 가혹 행위가 저질러졌음이 뒷날 확인됐다. 


그해 12월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가 없었던 것은 당국의 무리한 기소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2명이 사형, 13명이 무기징역과 유기징역형을 선고받았음에도 1970년 광복절에 정부는 서독과 프랑스와의 외교마찰 해소 차원에서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형 집행을 면제해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윤이상은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해 복역 2년 만인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이응로 역시 프랑스 정부의 항의로 69년 3월에 석방됐다. 


간첩의 오명을 쓰고 투옥됐던 동백림 사건 연루자들의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는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그가 피살되면서 끝났지만, 뒤를 이은 것은 신군부 독재였다.

예술인, 조국으로부터 버림받다

이응로는 1977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또다시 뜻하지 않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고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윤이상은 1971년 서독에 귀화한 뒤,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1983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이응노는 1989년에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윤이상은 1995년에 베를린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 동베를린. 이응로는 양아들을, 윤이상은 친구의 아들과 함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 도시를 방문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간첩단으로 포장했다고 밝히고 정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사건 발표 후 39년 만이었다.


진실위는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수사결과와 마찬가지로 북한방문, 금품수수, 특수교육 이수, 북측 요청사항 이행 등 실정법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는 “혐의가 미미하고 범의가 없었던 사람에 대해 범죄혐의를 확대하고 귀국 후 대북접촉 활동을 과장하고 특정 사실을 왜곡하는 등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진실위는 고 천상병 시인을 들었다. 천 시인이 한 대학 친구로부터 동베를린을 다녀온 사실을 들은 것을 암약 중인 간첩임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해 송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기고문 등을 통해 허위자백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천 시인이 폐인이 돼 석방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지만, 윤이상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한 것은 진실위 발표 이듬해인 2007년이다. 

▲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윤이상 묘소를 방문, 통영에서 가져간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독일 순방 중인 김정숙 여사가 윤이상 선생의 묘소를 방문해 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평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김 여사는 베를린 교외 도시 스판다우의 가토우 공원묘지 윤이상 선생의 묘소를 찾아 경남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관련 기사: 김정숙 여사, 독일에 '통영 동백나무' 가져간 사연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버림받은 음악가는 현직 대통령 부인이 고향으로부터 가져다 심어준 동백나무로 잊지 못한 고향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그것으로나마 그의 상처받은 영혼은 얼마간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 


동백림 사건 이후 50년이 흘렀다. 반백의 나이에 간첩으로 몰려 조국으로 송환됐던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분단 이념으로 재단해 버린 독재 시대의 정치적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이제 잊히어 가고 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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