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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1949년 오늘, 백범 김구 흉탄에 스러지다

백범의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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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 26일 직썰에 게재된 글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재발행합니다.

▲ 총알이 지나간 유리창을 통해 본 경교장 앞뜰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아래도 같음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백범 김구(1876~1949)는 경교장 집무실에서 창암학원 여교사와 담소 중이었다. 비서실에서는 경교장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바 있는 육군 소위 안두희가 비서들을 상대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안두희는 광복군 출신의 김학규(1900~1967) 장군의 소개로 백범을 만났던 인물이었다. (관련 기사: “탕! 탕! 탕! 탕!…내레 금방 선생님을 쏴시오”)


창암학원 여교사가 떠난 후 선우진 비서는 안두희를 백범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고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백범의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경교장 정문 경호실의 경호순경들이 카빈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황급히 본관으로 뛰어 올라왔다.  


현장에서 안두희는 체포되었고, 이내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주치의는 과다 출혈로 백범이 이미 운명했음을 알렸다. 오후 1시였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으로 일생을 조국 광복과 독립에 바친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최후는 너무나 어이없이, 그리고 허망하게 왔다. 향년 73세.  

▲ 백범이 피격될 때 입었던 피묻은 저고리. 문화재로 지정됐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백범은 경교장에서 생활하면서 건국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미군정과 함께 여러 정치세력들의 각축이 이어지던 해방 공간에서 백범의 거처였던 ‘서대문 경교장’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였다.


반탁운동 이후, 백범은 1948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란 제목의,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그는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에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 남북협상 출발 직전의 경교장, 이때 청년 학생들의 반대가 많아서 백범은 이들을 피해 나가야 했다.

▲ 남북협상차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축사를 하고 있는 백범. 평양 모란봉 극장

백범이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행을 결정하고 북행길에 오른 것은 1948년 4월 19일이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이 협상은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5월 10일, 백범은 빈손으로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달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1948. 11.)한 뒤 이듬해 ‘백범학원’과 ‘창암학교’를 세우는 등 정치적 칩거에 들어갔다.  

백범,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지다

한편 백범은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직업군인이긴 했지만 권총을 소지한 안두희가 경교장을 출입할 수 있었을 만큼 경호 시스템도 허술했다고 할 수 있다.  


당일, 평소와는 다른 낌새를 느낀 이들의 경고가 몇 차례 있었다. 군복 청년들과 헌병들이 경교장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고, 이를 예사롭게 여기지 않은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비서실에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안두희는 결국 비서의 안내로 집무실에 들어가 아주 마음 놓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안두희가 쏜 네 발의 총알 가운데 첫 번째 총알은 김구의 코 밑을 뚫고 오른쪽 볼을 빠져나와 유리창을 뚫었고, 두 번째 총알은 김구의 목을 정면으로 뚫은 뒤 유리창에 맞았다. 세 번째 총알은 김구의 오른쪽 가슴을 지나 폐를 뚫었고, 네 번째 총알은 김구의 아랫배를 관통했다."


- “탕! 탕! 탕! 탕!…내레 금방 선생님을 쏴시오”

평북 용천 출신의 월남 청년 안두희(1917~1996)는 우익단체 서북청년회를 거쳐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백범의 측근이었던 김학규의 소개로 한국독립당에 입당했으나 실제 활동은 하지 않았다.


안두희는 범행 뒤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 6. 27.)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안두희가 완전 복권된 것은 1953년 2월 15일이었으니 범행 후 4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죄는 지워졌다. 


대통령 이승만의 정적이었고, 중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 지도자의 살해범이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는 이 범행이 권력의 비호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혹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었다.  


김구의 남북 협상에 반대하고 단정을 지지하여 백범과 갈등했던 김학규는 암살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그는 암살범 안두희의 한국독립당 입당을 주선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에야 석방되었다. 정작 암살범보다 그를 백범에게 소개했던 김학규가 더 오래 복역한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안두희는 강원도에서 군납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일생 동안 백범 살해범의 죄를 벗지 못한 채 도피생활을 거듭해야 했다. 4·19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 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고 여러 차례 그를 추적해 온 사람들로부터 칼에 찔리거나 폭행을 당했다.

쫓기는 삶, 안두희의 최후

1980년대 이후 그는 이미 도피를 포기한 상태였으나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했다. 1996년 10월 23일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안두희는 자신을 추적해 온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6세)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향년 80세.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는 끝내 역사적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백범 사후 70년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김구 시해의 배후는 의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결국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적 타살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 백범 김구의 빈소 앞에 줄지어 선 조문 행렬

▲ 백범의 국민장에 참여한 대한부인회(위)와 지방에서의 조문(아래)

▲ 성대하게 베풀어진 백범 김구의 국민장 행렬. 이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첫 국민장이었다.

▲ 공주 마곡사에서 베풀어진 백범 김구의 49재를 마치고 관계자들이 찍은 기념촬영 사진

백범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애당초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쪽에서 민족장을 고집하자 김규식의 중재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장례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열흘 간 거행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았고 장례일에도 4, 5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전국 각 도시에도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를 배웅하였으니 ‘남한이 통곡 속에 싸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백범의 삶은 조국 광복을 위한 풍찬노숙의 역사 그 자체였음을 이 땅의 무지렁이 백성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민장, 온 겨레가 상주가 되었다

그의 장례는 온 국민이 상복을 입고, 스스로 상주가 되었던 역사였다. 7월 5일, 그의 유해는 효창공원의, 그가 몸소 이장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택 근처에 안장되었다. 백범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그의 아내 최준례는 일찍이 중국에서 병사(1924)했고, 맏이 인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충칭에서 죽었다.(1945) 백범은 독립투쟁의 여정에서 아내와 맏아들을 잃은 것이다.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어졌다. 손녀 효자도 어머니를 뒤를 따랐다.

▲ 효창공원 안장된 김구의 묘소. 백범이 몸소 이장한 3의사 묘역 가까이에 있다.

다행히 둘째 신(1922~2016)은 공군 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3남 1녀 자녀들도 공기업이나 정부기관 등에서 요직을 지냈다. 신의 아들들은 각각 주택공사 사장, 보훈처장을 역임하고 기업체 대표로 있다. 딸은 재벌기업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 잊히고 있는 대다수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과 비기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은 적어도 백범의 후손들에겐 해당되지 않았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구의 집안은 그나마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본인은 흉탄에 쓰러졌지만 후손은 비교적 교육도 잘 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르면서 순탄하고 안정적인 삶과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백범은 살아 있다

백범 사후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안두희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지만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63년 서울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에는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임정 마지막 주석이었던 백범은 임시정부와 동의어로 늘 기억되는 존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는 2019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맞추어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2019년까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조형물과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 부지와 예산 확보, 전시 자료 준비, 연구 작업 등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임정기념관 건립이 순조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해방 2주년 기념식(서울운동장)에서의 김구와 이승만. 둘은 사후에도 진보와 보수의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보수 반공주의자였던 백범이 이 땅에서 좌파의 원조쯤으로 인식되는 것은 ‘보수’의 본분이 변질되어 버린 우리 뒤틀린 현대사 탓이다. 이는 반일 민족주의자였던 백범이 친일파들을 중용하고 독재 끝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70년이 넘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달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던 백범의 전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분단 70년을 넘기며 우리가 일흔둘의 노구를 이끌고 남북협상을 위해 삼팔선을 넘었던 백범의 진정성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하지 못해 안달하는 보수 우익들의 역사 왜곡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이라고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마침내 백범을 ‘테러리스트’로까지 폄훼하는 까닭과 겹쳐 보인다. 노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에게 여전히 그는 강력한 정적인 것이다.


2007년에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백범이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이 집권하면서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과 무관하게 사후에도 보수-진보의 대립을 통해 백범과 이승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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