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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오늘, 일본 사죄 빠진 ‘한일기본조약’ 조인

대일 청구권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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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 21일 작성한 글을 업데이트했습니다.

▲ 일본 총리관저에서 진행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 한국 정부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일본 정부 시나 외상이 조인했다.

1965년 6월 22일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된 ‘대한민국과 일본 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1951년 첫 한일회담이 열린 지 14년 만에, 1945년 해방된 후 독립 국가로서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일본과 체결한 첫 조약이었다.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기본조약 조인

8월 14일에는 여당이 단독으로 국회를 열어 이 조약을 비준했고 12월 18일에는 중앙청에서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대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36년여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넘어 새로운 양국 관계를 재개하는 조약이었지만 그것은 여러 면에서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이뤄졌다.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이 열린 이래 14년 1개월 28일간에 걸친 양국 간의 교섭은 물론 전혀 순조롭지 않았다. 첫 회담은 한국이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8개 항’을 제시하자 일본이 오히려 한국이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이른바 역청구권을 주장하면서 결렬됐고 2차 회담은 독도 문제와 평화선 문제 등으로 틀어졌다. 


53년에 열린 3차 회담은 일본 수석대표의 망언(“일본의 36년간의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으로 결렬됐고, 제4, 5차 회담은 각각 4·19 혁명과 5·16 쿠데타로 중단됐다. 그나마 5차 회담에서 장면 총리가 고사카 젠타로 외상과 ‘배상금’ 아닌 ‘경제협력 방식’ 가능성 표명한 게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한일회담 주요 일지’ 참조]

애당초 한일회담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구상했던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소련의 팽창정책이 동유럽의 공산화로 진행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일본을 ‘냉전의 동반자’로 취하고자 했다. 1951년 미국은 일본과 강화조약 및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강화정책을 더욱 확대해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 봉쇄 정책을 수립했다. 

교착상태와 김-오히라 메모

한일회담을 추진해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꾀한 것은 미국의 동북아 봉쇄 정책의 연장이었다. 전쟁 전에는 우방국이었던 미국과 중국이 적대 국가로 떠오르면서 미국은 동북아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역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한일회담을 추진하게 된 동기에는 한일 양국의 경제적인 이해도 작용했다. 일본은 자국의 자본주의가 고도성장을 이루자 한국을 포함한 해외시장이 필요했고, 한국으로서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함에 따라 거액의 외자가 필요했으나 미국의 대한국 원조는 줄어들고 있었으므로 일본 자본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을 목표로 설정한 군사정부에서는 일본 자본의 도입을 위해 헌정의 유고로 두 차례나 중단된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61년 10월, 제6차 회담이 재개됐으나 청구권 액수·평화선 문제·독도 문제 등으로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교착상황을 해결한 것은 군사정부가 이듬해 일본에 파견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회담의 조기 타결을 원한 군사정부는 일본과의 비밀회담으로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한일 간 가장 큰 쟁점이었던 청구권 문제가 타결됐으며, 어업협정 문제 등도 1964년 4월에 이르러 타결돼 사실상 10여 년 만에 한일회담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메모와 합의’ 참조] 

그러나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해 3월에는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협상의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국민들은 이 협상이 매우 굴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는 고교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수막에는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연세대 학생들이 ‘매국적 한일회담 즉시 중단하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정문으로 나오고 있다.

▲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봉을 휘두르며 진압하고 있는 경찰

학생 시위가 절정을 이루자 박정희는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해 반대 여론을 억누르며 회담을 이어 나갔다. 그리하여 이듬해(1965) 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임시조인된 데 이어 6월 22일에는 동경의 일본 수상관저에서 기본조약을 포함한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기본조약에 따라 한일 양국은 외교·영사 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과 그 이전에 양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했으며, 일본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했다. 

청구권 포기, ‘완전히’ ‘최종적으로’

김종필과 오히라의 메모를 바탕으로 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조인됐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하고,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했다.


대일 청구권 문제는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완벽하게(!) 정리됐다. (여기 쓰인 ‘완전히’와 ‘최종적으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에 쓰인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협정’ 제2조 참조]

▲ '문화재 협정'을 통해 돌려받게 된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이중적인 자세를 보였다. 3억 달러의 무상자금은 전쟁 전의 역사를 청산하는 배상금의 성격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독립축하금, 경제협력 자금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어업협정’에서는 양국 연안 12해리의 어업 전관 수역과 어업 자원의 지속적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정한 공동 규제 수역을 설정했다. 또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 의해 재일한국인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일제 통치 기간에 일본으로 유출된 다수의 문화재 가운데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124호) 외 국보 1점, 보물 3점을 반환받을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해방 20년 만에,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55년 만에 한일 양국은 독립 국가로서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은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한일기본조약으로도 식민지 과거청산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대일·대한반도 정책, 식민지 병합의 불법적 성격을 규정할 기준이 될 국제법의 부재와 보상 기준의 불분명함 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청구권 교섭에 밀려 과거사 청산이라는 본질이 흐지부지됐고, 애초부터 한일회담의 성격 자체가 식민지 청산을 제기할 만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역사 미청산으로 이어지는 갈등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는 과거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고 일본 내에서 과거를 반성하는 세력들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으므로 한일회담이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토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또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대일평화조약은 반공 논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조약을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학 연구소 장박진 연구원) 


청산되지 못한 역사 탓에 한일관계의 불안정성은 여전하다.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에 대한 배상을 다투는 갈등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국교 정상화로 인한 경제협력이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양국 간 무역 불균형 등의 문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 밖에도 재일한국인과 사할린 교포 문제, 독도 문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 일본의 재무장 문제 등 미해결 현안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양국 기본조약은 청산하지 못한 역사로 말미암은 불씨를 품은 채 여전히 내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하 2019년 6월 21일 추가)

최근 발표된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신문의 공동 여론조사는 현재의 한일관계를 양국 국민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자료다. 꽉 막힌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두 나라 국민의 인식의 격차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이러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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