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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독립 만세’ 외치던 학생들이 일제 재판부에 한 말

1926년 6월 10일, 순종 장례일 터진 ‘조선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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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장례일(인산일)에 터진 ‘조선 독립만세!’

▲ 일본 경찰이 만세시위를 벌이려는 군중을 진압하고 있다.

1926년 6월 10일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1874~1926)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일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래 일제와 친일파의 압력으로 퇴위하게 된 고종을 이어 대한제국 제2대 황제가 된 순종은 명목상 재위 18년 만인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승하했고, 이날 인산이 거행된 것이었다.


순종은 황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뒤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1910년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황제였다. 이후 그는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서 허수아비 군주로 살아야 했다. 


그의 죽음은 더는 정치적 사건도 아니었으나 그의 인산을 계기로 1919년 3·1운동 이후 내연하고 있던 민족해방 운동이 다시 수면으로 떠 오르게 했다. 이날 인산에 참가한 학생들은 2만 4천여 명. 만세시위는 오전 8시 30분께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이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천여 장을 뿌리며 시작됐다.

▲ 1926년 6월 10일에 거행된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6·10만세운동이 불타올랐다.

출처ⓒ학생백과

만세시위는 관수교(8시 45분), 경성사범학교(9시 30분), 훈련원(오후 1시), 동대문(1시 30분), 신설동(2시), 동묘(2시 20분) 부근 등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형식으로 계속됐다. 시위는 군중들이 합세하면서 3·1운동과 같은 만세시위를 다시 한번 전개하고자 했던 지도부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시위는 곧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춰 경성부에는 7천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과 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는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항일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지방 시위는 산발적인 시위에 그쳤다.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돼 11명이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됐다.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주동 학생들은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이병림)
“우리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박하균)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천진)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했다.” (이선호)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했다.” (유면희)
“4,000여 매의 격문을 각 남녀 고등보통학교에 배부했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했다.” (박용규)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배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 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해 만세를 고창했다.” (곽대형)

공판은 고등법원을 거쳐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결국 10명이 구금됐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동맹 휴학은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됐다.

민족운동 침체기, 학생운동이 활력소로 떠오르다

1926년 무렵은 3·1운동 이후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이 일제의 탄압과 함께 서구 열강의 소극적 지원 등으로 구체적 성과를 내지 못하며 힘을 잃어가고 있던 때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1년 레닌 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자금 문제와 1925년 이승만 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지리멸렬 상태였다.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 밀려 러시아 방면으로 밀려나야 했는 데다가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이처럼 해외 독립운동은 1922년을 고비로 활력을 거의 잃고 있었다.


이렇듯 국내외 민족운동이 침체 일로에 빠져 있을 때 1920년대 민족운동의 활력소로 떠오른 게 학생운동이었다. 이전의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동맹 휴학의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전개된 것이 바로 6·10 만세운동이었다. 


6·10 만세운동은 세 갈래로 추진됐다는 게 정설이다. 첫 번째 계열은 노총계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권오설(1899~1930)을 중심으로 ‘6·10 투쟁 특별위원회’가 설치돼 시위를 지도해 전국적인 항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고자 했다. (관련 기사: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두 번째 계열은 전문학교 학생들 중심의 사직동계이다. 박하균(연희전문)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원 80여 명이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이 기회에 민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뜻을 모았고 격문을 기초하고 인쇄해 각 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세 번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였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곽대형 등이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 고등보통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 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 민족대표 김성수·최남선·최린”이라는 격문을 기초했다.


6·10 만세운동에 참여한 세력들은 다양했다. 나라 밖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 상해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임시정부의 외곽 조직인 의용대, 일본 유학생 등이 참가했고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 국내 학생운동 조직들이 연대해 시위를 추진했다. 


6·10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이념적 편향의 구호와 주장들이 제기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조직적 특성 때문이었다. 


시위대는 국가가 부담하는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의 시행, 식민지 노예화 교육의 폐지,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보통학교 교육 용어를 조선어로, 학생집회의 자유 보장, 대학은 조선인 중심으로, 일본인 교원 배척 등을 주장했다. 한편 군중들에게 배포된 격문의 내용도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표 참조]

다양한 구호와 주장 분출

각 참여 조직들은 만세시위 과정에서도 일정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조선공산당 계열은 운동의 지도부를 이끌었고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맡았다. 여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같은 학생단체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선도하기로 했다.

▲ 6.10만세 운동 첫 공판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동기와 목적은 삼척동자도 안다고 씌어 있다.

특히 3·1운동 이후 조직화돼 온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학생운동 조직이 중심세력으로 6·10 만세운동을 수행한 것은 의의가 크다. 6·10을 계기로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된 뒤 이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같은 주요 반일운동의 주체가 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간부 권오설은 순종의 국장일에 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계획, 선전문 약 5만 매를 인쇄·보관하고 있다가 거사 3일 전인 6월 7일, 동지 130여 명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해체됐다. 


자신이 기획하고 추진한 6·10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피지도 못한 채 구속된 권오설은 1928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함께 구속된 집안 청년들 가운데 권오운(1904~1927)과 권오상(1900~1928)은 1927년과 1928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했다.

6·10 주역 권오설, 2005년에 복권되다

뒤이어 출옥을 100일 앞둔 1930년 권오설도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 채 순국했다. 15년 뒤에 조국은 해방됐지만 1919년 3·1 만세운동을 이으면서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완결되는 국내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6·10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사회주의자 권오설은 잊히어 왔다. 


그가 국가의 기억에서 복권된 것은 2005년 3월 1일이다.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됐던 권오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것이다. 그보다 앞선 2001년 그의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의 들머리, 풍산들을 내려다보는 가곡 저수지 옆 언덕에 ‘항일 구국 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가 세워졌다.

▲ 2001년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 들머리에 ‘항일 구국 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가 세워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지 75년, 조국 해방 60년 만에 국가 기록으로 복권한 권오설의 모습은 낡은 사진뿐이다. 감옥에서 찍은, 일그러지고 빛 바랜 사진 속에서 젊은 혁명가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복제 과정에서 뒤집힌 수인번호는 마치 전도된 역사를 암시하는 것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6·10만세 운동 격문, 우리 역사넷 

- 6·10만세 운동, 국가기록원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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