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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인 독립운동가 사형에 악용됐던 '이 법'

1925년 5월 12일, ‘치안유지법’ 시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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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5월 12일, 일본제국은 한 달 전인 4월 12일 법률 제46호로 공포됐던 치안유지법의 시행에 들어갔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포된 긴급칙령이 전신인 이 법률은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고 칙령에 따라 조선, 타이완, 사할린에서도 시행됐다.

치안유지법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전가의 보도

거의 동시에 제정됐던 보통선거법이 민심을 달래기 위한 당근이었다면 치안유지법은 보통선거법 시행으로 활성화될 정치 운동을 막으려는 의도를 숨긴 채찍이었다. 러시아 혁명(1917)의 영향으로 활발해진 일본 내 공산주의운동을 억압하려는 목적 이외에도 이 법은 노동운동과 활동가를 탄압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됐다.


치안유지법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국체를 변혁하고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을 알고서 이에 가입한 자는 십 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는 제1조가 그 근거였다.


내용 중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은 사회주의 운동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사법부는 ‘국체의 변혁’이라는 요건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제국 주권의 존립에 관한 사항으로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독립운동 처벌의 근거를 썼다.


일본 사법부는 왜곡된 법 논리로 독립운동이 곧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만들었다. 그 법 논리는 “식민독립의 기도는 영토의 참절(국토의 일부 또는 전부를 함부로 차지하여 주권을 빼앗으려고 함)이고 이는 곧 천황의 통치권을 축소하는 것이므로 치안유지법 1조가 금지하는 ‘국체의 변혁’에 해당한다”라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면서 일본(‘내지’)과 조선을 차별했다. 치안유지법이 일본에서는 사형판결을 받은 사례가 없었으나 한반도에서는 예외적으로 이 법에 따라 조선인 독립운동가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것이다.

적용도 차별, 조선에선 사형선고까지

치안유지법은 제2조부터 5조까지 제1조의 목적 사항의 실행에 대해 협의하거나 선동한 자 및 재산상의 이익을 공여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제7조에서는 국외에서의 행위도 처벌하도록 했다. 이로써 치안유지법은 한민족의 사상통제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등 일체의 민족운동을 탄압하는 전가의 보도가 된 것이다.


일제가 사상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경찰과 사상검사를 배치하고 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이 법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또 조선에서 법률의 적용과 조문의 해석을 일본보다 가혹하게 하여 위반자들을 엄벌한 것은 위협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법률은 일본에서는 주로 좌파 운동에 대한 탄압의 수단이었으나 1940년대 조선에서는 민족 독립운동 탄압에 악용됐다. 제정 당시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였던 처벌 조항이 1928년 개정되면서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강화됐다.

치안유지법 떠난 자리에 국가보안법

일제는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에 그때까지 7조에 그쳤던 법률 조항을 전면 개정해 65조의 새로운 치안유지법을 공포하고 시행했다. 새 법에 따라 처벌은 강해졌으며 ‘예방구금제도’도 도입됐다. 일제는 이 법으로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 관련자 대부분을 처벌했으니 이 법은 식민통치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쓰인 셈이다.

▲ 윤동주(1917~1945)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이들도 치안유지법의 희생자로 일제의 감옥에서 숨졌다.

종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인권지령 ‘정치적, 공민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의 제거에 대한 사령부 각서’에 따라 이 법의 폐지를 명령했다. 마침내 치안유지법은 같은 해 10월 15일, ‘쇼와 20년 칙령 제575호’로 폐지돼 사라졌다.

그러나 3년 뒤, 독립국 대한민국에서 이 악법은 뒤틀린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치안유지법이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체제 인사와 식민지 저항세력의 사상통제에 이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은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하는데 전가의 보도가 됐다.


국가보안법 70년, 11차례나 개정을 거듭해 누더기가 된 법이지만 오늘도 그것은 열린 사회를 부정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누르는 질곡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그것이 국가를 지켜준다고 믿는 사람도 상존한다.

▲ 국보법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게 국가보위의 수단이라는 이도 있다.

국가보안법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제19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제21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22조)를 일거에 무력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체제와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핵심점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2018년, 남북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선언은 분단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을 환기해줬다. 북미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평화에 대한 상상력을 부르는 2019년, 이제 망팔, 일흔한 살 고령의 국가보안법은 언제쯤 그 명운을 다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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