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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당신이 몰랐던 소파 방정환의 이야기

조회수 2019. 5. 5.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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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소년운동'은 위험하고 치열했다.

어린이 해방의 기수 방정환 서른둘에 지다

▲ 망우리의 소파 묘역. 가운데 묘비에 '동심여선,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묘’가 새겨져 있다.

1931년 7월 23일 소파 방정환(1899~1931)이 스트레스성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란 낱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였다. 향년 서른두 살.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소년운동에 뛰어든 이래 십 년 동안 그는 이 나라 소년운동의 산 역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유교 도덕에 얽매여 있던 어린이들을 독자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그들이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방한 사람이었다.

소파는 서울 출신이다. 1913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했다.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혼인한 것은 1917년 열여덟 살 때였다. 아버지와 의형제였던 천도교인의 주선으로 이뤄진 중매결혼이었다.


그는 류광열·이중각·이복원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기관지를 펴냈다. 기관지 격으로 낸 <신청년>(1919)은 실제로 문예 동인지의 성격이 강했다. 소파는 여러 필명으로 쓴 글을 실은 <신청년>의 발행과 편집을 주도했다.


1918년 소파는 장인이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천도교 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성장하면서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듬해 3·1 만세운동 때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내다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소파는 직접 등사기로 찍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소파는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지만,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과 함께 일경의 고문을 당해야 했다.

▲ 1926년 <개벽>의 강제폐간에 항의투쟁을 벌이는 기자들. 가운데가 소파

1920년에 소파는 개벽사 도쿄 특파원 겸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를 공부했다.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종합월간지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낱말이 처음 쓰였다. 

천도교소년회 조직해 본격적 소년운동 전개

소파는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안데르센과 그림의 동화와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번역해 이듬해 7월 개벽사에서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사랑의 선물>은 소파가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었다.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는 창립 1주년을 기념해 제1회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십 년 후 조선을 려(廬)하라'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하고 어린이의 날의 취지를 거리에서 선전했다.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월간 <어린이>는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에서 발행을 대행했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의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이란 전단 12만 장이 배포됐다.

▲ 월간 어린이잡지 <어린이>(왼쪽 위, 아래) 어린이날 포스터와 동화집 표지(오른쪽)

1923년 소파가 결성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에서는 같은 해 전조선 소년지도자대회와 아동예술강습회를 개최했다. 1924년에는 전조선 소년지도자대회를 소집해 흩어져 있는 단체의 통일을 꾀했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를 열었고 1928년에는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베풀었다.


1921년 시작한 소파와 동지들의 소년운동은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전통사회에서 천대받았던 어린이들의 인권을 환기하는 등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패러다임을 바꾸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어린이라는 존칭어는 그냥 '아이’로 던져져 있던 아동을 ‘젊은이’나 ‘늙은이’와 나란히 독자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혁명적 언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어린이, 어린이날, 소년운동의 성과들

1925년은 소파의 소년운동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해 5월 1일, 제3회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오색의 선전 전단 30~40만 장이 뿌려졌다. 사람들은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희망은 어린이", "앞날의 임자는 어린이",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를 잘 키우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소파는 5월 말에 경성 소년 지도자연합회 모임에 지도위원으로 선출돼 서울 안 40여 소년단체를 통합해 ‘소년운동연합회’를 조직했다. 이듬해인 1926년에는 순종의 국장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중지했고 6·10만세 운동으로 그는 예비 검속을 당했다.


1927년에 소파는 <어린이> 1월호부터 ‘어린이 독본’을 연재했다. 1930년 12월까지 총 20회에 걸쳐 연재된 어린이 독본은 일종의 도덕 교과서로 실제로 당시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였다. 4월에는 이른바 ‘개벽사 필화사건’으로 차상찬(1887~1946)과 함께 구속됐다가 월말께 석방됐다. 


이 해에 소년운동 단체인 소년운동협회와 사회주의 계열인 오월회의 대립으로 어린이날 축하식이 따로 거행되는 일이 있었다. 이듬해인 1928년 오월회가 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조직체를 조선소년연합회에서 조선소년총동맹으로 변경되고 일경의 압력이 심해지자 소파는 소년운동단체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잡지 <어린이>와 동화구연대회, 강연회 그리고 라디오 방송 활동 등에 전념했다.

▲ 망우리 공원 묘역 입구의 소파 어록비. '어린이날의 약속'을 새겼다.

그해 5월 1일 천도교기념관에서 1천5백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동화구연대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뤘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어린이날 행사는 조선소년총연맹(일제가 조선소년총동맹이란 단체명의 사용을 금해 바꾼 이름)의 주관 아래 전국적으로 열릴 수 있었다.


소년운동은 좌우파의 주도권 싸움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끝내 1929년 어린이날 기념행사가 총연맹측과 천도교 소년연합회의 두 갈래로 거행됨으로써 다시 양분되고 말았다. 


1928년 소년운동의 통합체인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직체를 변경해 조선소년총동맹이 됐다. 그러나 일제당국이 이 단체명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소년총연맹으로 바꿨다.

소년운동의 분열 등 과로로 쓰러지다

이 조직체는 사회주의 계열이 소년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조직체를 변경한 것이다. 이로써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해 종래 소년운동을 주도해오던 색동회와 조선소년운동협회 등 민족주의 계열은 소년운동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파 방정환이 쓰러진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누적된 결과 때문이었다. 소파는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 문제 강연회, 집필,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등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소파는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유쾌했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두고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고 소파는 홍제동에 묻혔다가 5주기(1936)에 망우리 묘지에 안장됐다. ‘동심여선,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묘’란 묘비가 세워졌다. 묘역 입구의 어록비에는 '어린이날의 약속' 중 일부가 새겨졌다. 


비록 32년의 짧은 생애지만, 소파의 실천적 삶은 홀로 우뚝하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로 평가된다. 또, 그는 탁월한 번안·개작작가고 동화작가이며 동화 구연가이자 아동 잡지 편집인이었다. 


그는 또 어린이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준 교육자요 문학가였다. 그는 어린이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고쳐 어린이들이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었다. 


소파가 심고 가꾼 소년운동은 어린이날의 제정 및 행사를 둘러싼 갈등과 내분, 소년운동 지도자의 부족, 소년운동에 대한 일반의 이해 부족, 일제의 탄압 등으로 1920년대 후반 쇠퇴의 조짐을 보이다가 중일 전쟁(1937)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금지됐다. 소년운동이 재개된 것은 광복 이후였다.

출처: ⓒ두피디아
▲ 1971년 서울 남산공원에 세운 소파의 동상은 1987년에 서울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졌다.

동심여선, 소파의 실천적 삶 우뚝

26주기인 1957년 어린이날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 선포됐고 기일에는 ‘소파상’이 제정됐다.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동상은 1987년 5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됐다.


1983년 5월 5일에는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세워졌고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됐다. 


1978년에는 금관문화훈장, 1990년에는 일제 때의 독립운동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됐다. 1996년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 기념사업회’가 창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32년 생애는 짧았지만, 그는 크고 값진 유산을 남긴 것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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