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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정부의 총격을 지켜본 초등학생의 시

조회수 2019. 4. 19. 11: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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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
출처: ⓒ4월혁명회
▲ 군과 하나가 된 시위대가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서 환호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3.15 대통령선거 포스터.
▲ 마산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 경찰은 최루탄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
▲ 시위대가 중앙청을 향하고 있다.

4·19 혁명 59돌을 맞는다. 한국전쟁의 상처도 채 아물지 못한 1960년 벽두에 들불처럼 타오른 청년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분노는 독재자 이승만의 노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세워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분출하는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4월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지면서 ‘미완의 혁명’이 됐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이 혁명의 성과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독재가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으로 산업화·근대화를 이끌었다고 해서 사월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퇴색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젊은이들이 희생으로 치러낸 혁명을 느꺼워하면서 시인들은 시로 이 새로운 시대와 자유를 노래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비롯한 많은 시가 탄생한 배경이다. 김수영과 신동문 같은 진보 성향 시인은 물론이고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유치환, 정한모, 구상, 박남수, 장만영, 김현승, 김춘수, 황금찬 등의 시인들도 혁명을 노래했다. (도종환, ‘4·19를 노래한 시’ 참조)


도종환은 김용호(1912~1973) 시인의 「해마다 4월이 오면」 (조선일보, 1960년 4월 28일 자)이 4월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알게 해주는 시라고 소개한다. “오누이들의 / 정다운 얘기에 / 어느 집 질화로엔 /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눈 오는 밤에) 같은 서정적인 시를 쓴 시인의 진솔한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혁명과 혁명의 의미를 환기해 준다.

▲ 경무대까지 진출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군중들이 을지로-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 교수단도 시위에 나섰다.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1970년에 만든 성내운(1926~1989) 교수의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 낭송 테이프에는 두 편의 4·19 관련 시가 실려 있다. 하나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쓴 시 ‘언니 오빠는 왜 총에 맞았나요’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경림의 시 ‘4·19 날 고향에 와서’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교육학자가 낭송하는 초등학교 아이의 시는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역산해 보면, 이 테이프를 만들 때 성내운 교수는 40대 중반의 장년이었고, 예의 학생은 스물두 살이었으니, 아마 꿈 많은 대학생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49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뜨거운 목소리로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를 외우던 학자는 세상을 떠났고, 스물두 살 청춘은 우리 나이로 일흔두 살이 됐겠다. 그이는 지금 살아 있는가.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떤 삶을 이어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내운 교수의 목소리를 듣는데 삶과 역사의 순환이 불현듯 무상해진다. 


나라를 지켜달라고 국민이 준 총기를 그 주인들에게 겨눈 역사는 이 땅에서도 여러 번 반복됐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저질러진 잔혹한 학살극을 빼면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 군중에 총질한 최초의 사건이 이 1960년의 4월혁명이 아닌가 싶다.

▲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수송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시위에 나섰다.

초등 5학년짜리 아이의 눈물 어린 시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저 끔찍한 비극을 고스란히 되살려준다. 그러나 이 혁명은 이듬해, 일본(만주)군 출신 군인이 자행한 쿠데타에 의해 짓밟히면서 ‘미완’이 되고 만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의거’로 격하된 4·19가 헌정체제의 변혁을 강제해 낸 ‘혁명’으로 복권되는 데는 또 삼십 년이 걸렸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이 목숨을 잃고 6천여 명이 부상했다. 이 비극의 역사는 20년 후에 신군부세력에 의해 자행된 광주항쟁에서 되풀이된다. 어떤 이유로든 국민의 경찰, 국민의 군대가 그 국민의 가슴에다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야만이다. 5·18을 일러 “단 한 사람만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크고 많은 희생”이라 갈파한 어느 외신 보도는 이 젊은 혁명의 시간에 숨져 간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무게로 유효하다.

오빠와 언니는 왜 총 맞았나요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올 때면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강명희(당시 서울수송초등 5)

노래를 찾는 사람들 4집에 실렸던 노래 「진달래」는 정운 이영도가 쓴 4·19 희생자들을 기린 시라는 걸 훨씬 뒤에 알았다. 시의 유래도 유래지만, 이영도가 누구인가. 청마 유치환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고 노래한 그이가 아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형님이 사 온 청마의 서한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로 나는 청마와 이영도를 만났다. 하드커버의 표지에 실린 시 ‘행복’을 외워버린 게 아마 그때쯤일 거다. 그이가 이호우 시인과 오누이 사이란 걸 알았지만 정작 이호우를 그의 유명한 현대시조 「개화」로 만난 것은 이듬해 중학교에 입학하고서였다. 


그러나 이영도는 내게 청마가 5천여 통의 편지로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정작 국어를 가르치면서도 나는 그이의 시조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정운의 현대시조 「진달래」를 내려받고, 진보넷에서 받은 노찾사의 목소리로 그 노래를 듣는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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