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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딱 하나 남은 성냥공장이 문을 닫게 된 사연

조회수 2019. 4. 2.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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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경북 의성 경제의 기둥이었다.
▲ 성광성냥은 2013년 조업을 중지하면서 성냥 생산이 종지부를 찍었다. 빈 공장에 남아 있는 생산의 흔적인 성냥개비

경상북도 의성에 마지막 성냥공장이 남아 있다는 얘길 들은 게 몇 해 전이다. 2000년대 초반 읍내의 여고에서 2년 근무한 적도 있는데도 그걸 왜 몰랐을까, 고갤 갸웃하면서도 이내 잊어버렸다. 두 번째 소식은 그 공장이 마침내 문을 닫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2015년께라고 생각했는데, 의성 현지에 가보고 나서야 공장이 문은 닫은 게 그보다 이른 2013년 11월이었다는 걸 알았다. 문을 닫은 이유야 뻔하다. 국내의 다른 성냥공장과 마찬가지로 값싼 중국산 성냥의 공세 앞에 손을 든 것이다.

결국 문을 닫기까지

중국산 제품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려 문을 닫는 회사야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65살 이상 인구가 2만 567명(38.7%)에 이르러 고령화 지수는 전국 1위, 20~39살 가임여성 수가 고령자 수의 절반이 안 되는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소멸 대상 지자체 1순위’로 꼽히는 지역인 의성 이야기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1960년대 후반에 20만이 넘었던 의성 인구는 2019년 2월 5만 2,799명(의성군 홈페이지)로 집계됐다. 군 지역으로선 인구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꼽히게 된 인구 구성이 문제다. 변변한 제조업체도 없는 의성에 한때 가장 잘 나가는 회사였던 성광성냥의 휴업이 현재 시점에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성광성냥공장 정문이 닫혀 있다.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것 그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 성광성냥은 2013년에 경북 산업유산과 향토뿌리기업으로 지정됐으나 그해 11월에 문을 닫았다.

의성과 군위에 사는 두 친구와 함께 닫힌 공장 문 앞에 닿은 것은 오후 4시께였다. 의성읍 향교길 57-4번지, 의성향교 앞에 있는 성광성냥공업사가 문을 연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2월이다. 2013년 11월 가동을 중지할 때까지 59년 동안 인근은 물론 전국 가정에 성냥을 공급했다.


굳게 닫힌 정문 왼쪽에 회사 상호를 새긴 철제 간판 아래로 2013년 5월에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경상북도 산업유산’, ‘향토 뿌리 기업’ 명패가 걸렸다. 그러나 공장은 여섯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조업 중지에 들어갔다. 산업유산도 향토기업도 가격 경쟁력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미리 전화로 약속한 손진국(83) 대표는 이내 골목 저편에서 나타났다. 여든이 넘은 분인데도 혈색도 좋고 건강해 보이는 그는 잠긴 문을 따고 우릴 공장 안으로 안내했다. 대문 안으로 들자 양옆으로 여러 동의 건물이 나타났는데, 터가 무척 넓었다. 손 대표는 공장 전체 터가 2,300평에 이른다고 했다.

▲ 성광성냥공업사의 부지는 모두 2,300평이 이른다. 국내에 성냥 생산의 일괄공정 설비를 갖추고 있는 유일한 공장이다.
▲ 성냥개비 자재인 포플러 원목. 이 원목은 지름 2mm의 성냥개비로 가공된다.

성냥을 국내에 처음 들여온 이는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승려 이동인이다. 부산과 인천, 원산항으로 수입되던 성냥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인천 동구 송림동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였다. ‘인촌’은 일본에서 성냥을 이르는 이름이다. 병사들이 즐겨 부른 저속한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가 생긴 배경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영세 성냥공장이 200여 개소(자료 대부분이 300여 개소로 기록하고 있지만, 손 대표는 실제 200여 개소 정도였다고 한다)에 이르렀다. 성광성냥공업사는 1954년 2월 월남한 실향민과 의성지역 유지 몇 명이 뜻을 모아 창업한 회사였다. 


관련 업계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잖이 있었을 때, 민생의 재건에 따른 성냥의 수요가 필요할 때를 노린 창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 대표는 당시 큰 트럭에 성냥을 가득 싣고 통영과 부산 등 남해안과 영덕·울진·속초 등 동해안으로 팔러 다닐 때를 회고했다. 


성광성냥은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습기가 많은 곳에서도 잘 켜지고 잘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성냥갑에 새겨진 오리 상표 덕도 보았다. 뱃사람들은 ‘물에 빠지지 않는 오리’처럼 배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오리 상표에 자신들의 소망을 부여한 것이다.

한때는 지역 경제의 기둥

성광성냥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호롱불을 켜려고 해도 어두컴컴해서 성냥조차 보이지 않는 시골에서 눈에 잘 뜨이게 성냥갑에 야광 염료를 칠한 것이다. 이처럼 바닷가와 시골을 겨냥한 제품으로 성광성냥은 호황을 누렸다.


손 대표는 열일곱 살 때 직공으로 성광성냥에 입사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뒤에 공장장이 됐고, 스물한 살 때 상무로 승진하고 지분을 갖게 되었다. 공장도 발전을 거듭해 한때 종업원을 162명까지 두었고, 가히 의성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톡톡히 했다.

▲ 성광성냥공업사는 원목을 성냥개비로 바꾸어 완제품을 생산하는 일괄 자동화공정을 갖춘 공장이었다.

성냥공장에서는 기계 운전이나 원목을 다루는 등 힘쓰는 일은 남자 직공들이 맡지만, 만들어진 성냥 낱알을 수작업으로 성냥갑에 넣는 일 등은 여자 직공의 몫이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던 그 시절, 향토기업 성광성냥 공장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터로 나온 여성들로 넘쳤다.


하루 평균 1만 5,000갑(550개비 기준)을 생산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을 때는 2대의 통근버스를 운행하여 직공들에게 출퇴근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읍내에 하도급업체를 만들어 거기서 제작한 목곽 성냥갑을 납품받을 정도였다. 일종의 외주였던 셈인데, 외부에서 목곽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200여 명에 이르렀다. 


200여 개에 이르렀던 성냥공장은 1970년대 들면서 50여 개로 재편됐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출시되면서 성냥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2000년에 들어서는 성광성냥을 비롯하여 돈표(경북 영주 영화인촌산업), 기린표(김해 경남산업공사), 공작표(광주광역시 공작화학공업) 등 4곳만이 남았다. 


살아남은 공장도 몇 년 더 견디지 못했다. 공작표와 돈표가 각각 2001년과 2002년에 문을 닫으면서 국내 성냥공장의 맥은 성광성냥공업사와 경남산업공사 두 곳만이 힘겹게 이어가야 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경남산업공사도 주요 설비를 동남아시아에 처분하고 수입해 포장과 판매만 하게 되면서 완제품 생산공장은 결국 성광성냥 한 곳만 남게 된 것이었다. 


결국, 2013년 11월에 성광성냥이 조업을 중지했고, 4년 후인 2017년 8월에는 경남산업공사가 문을 닫았다. 1948년에 문을 연 경남산업공사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마침내 국내에는 성냥공장이 한 군데도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재활의 길을 찾는 성광성냥

손 대표를 따라 공장을 한 바퀴 도는 데 반 시간쯤 걸렸다. 성냥을 만드는 데 공정이 그 정도로 복잡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름드리 포플러 원목이 2mm 남짓한 성냥개비로 바뀌는 데 드는 공정의 수도 만만찮았다.


원목이 입고되면 이를 40cm로 절단해 껍질을 벗긴 뒤 축목부에서 2.2mm 합판으로 만들고 채를 썰 듯 42·48mm 등 두 종류 성냥개비를 만든다. 이는 다시 건조기를 지나면 수분을 없앤 뒤에 성냥개비에 화약을 묻힌다. 이 낱낱의 성냥개비를 수작업으로 성냥갑에 넣고 옆면에 적린(낮은 온도에서도 불이 잘 붙는 성질을 가진 붉은 인)을 붙이는 일까지 마치면 한 통의 성냥이 완성되는 것이다. 


꽤 긴 공정에 드는 기계설비도 만만찮았다. 거대한 규모의 철제 설비를 갖춘 작업장이 윤전부, 축목부, 건조부, 소갑부, 대갑부, 배합실 등 13개 동이나 되는 이유다. 손 대표는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다 보니 공정이 길고 설비가 복잡하다고 말했다.

▲ 성냥갑에 담기기 직전의 공정을 거쳐 나온 성냥개비들. 이 역시 공장이 남긴 흔적이다.
▲ 빈 성냥갑만 남기고 공장은 문을 닫았다. 멈춘 기계 설비 위에 성냥갑만 빼곡하게 남았다.

그러나 그게 역설적으로 경쟁력을 잃은 결정적 이유는 아닐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긴 공정이 인건비와 제조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져 결국은 값싼 인건비를 무기 삼아 밀려드는 중국산의 공격 앞에 손을 들고 만 것이 아닌가 말이다. 


조업을 중지하게 된 2013년에 성광성냥은 하루 생산량을 1만 5천 갑에서 1,500갑까지 줄였다. 그러나 그것도 역부족이었다. 그 전해에 경상북도와 의성군이 성광성냥을 예비 사회적기업과 일자리 창출 사업장으로 지정했으나 2013년 8월에 요건 미달로 재지정되지 못했다. 2013년 5월 경상북도 지정 ‘경상북도 산업유산’, ‘향토 뿌리 기업’으로 지정된 것도 힘이 되지 못했다. 


2014년에는 의성군이 중기지방재정계획에 총사업비 40억 원 규모의 성냥박물관 건립을 포함해 추진했으나 2015년 경상북도의 관광 자원화 투자사업 심사에서 탈락했다. 기업으로서든 기념사업으로서든 성광성냥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잇따라 수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문화재로서도 관광자원으로서도 성냥공장의 가치는 섣불리 무시할 처지가 아니다. 의성군에서 이의 활용방안을 찾는 용역을 두 차례나 거친 이유다. 그러나 두 차례 용역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온 건 이게 만만하게 접근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증빙한다. 


흔치 않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성광성냥을 버려두거나 사장돼서는 안 된다는 데는 모두의 의견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물관이든 체험전시관이든 간에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발목을 잡는 것이다. 사업 시행의 결과 관리 비용만 쏟아부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의성군에서는 성광성냥이 원목을 가공해 마지막 완성품인 성냥갑까지 만들어지는 일괄공정 설비를 갖추고 있는 국내의 유일한 공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현재 중국이나 베트남의 성냥공장은 공정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일괄공정을 갖추는 게 비용이나 운영 면에서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냥공장과 관련한 의성군의 계획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성광성냥 공장을 전통시장과 연계한 테마형 마을을 조성하여 관광객 유치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추진한다”로 정리돼 있다. 그러나 아직 그 구체적 청사진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다.

무엇으로든 되살려야 한다

의성군에서는 성냥공장을 등록문화재로 신청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 내용 면에서도 다양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갖추고 있는 성냥공장은 도 지정문화재인 의성향교 바로 앞에 있어서 개발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의성군에서는 현재 관련 용역이 진행 중인데, ‘도심 재생 프로젝트’와 ‘마을 미술 프로젝트’ 등을 결합해 공장에서 성냥을 생산하고 전시 체험시설을 세워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성광성냥에서 퇴직한 60대 숙련공들이 주변에 사니까, 이분들에게 다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진행 중인 용역의 결과가 나오면 이를 토대로 국비를 받아서 본격적으로 테마형 마을인 ‘희망마을’이 꾸려지는 것은 언제쯤일까. 현재까지 그 구체적 일정이 나오지 않고 있음에 손진국 대표는 초조함과 아쉬움을 내비쳤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성냥공장인 만큼 이를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더 바라는 것은 없다. 공장이 지역의 관광자원이든 문화유산이든 하루바삐 활용되어 지역에 보탬이 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시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 전 생애를 성냥공장에 바친 손진국 대표(83). 그는 열일곱 살에 공장에 들어와 일흔여덟 살까지 공장을 운영했다.
▲ 성광성냥에서 생산한 향로성냥. 오리표로 바닷가 마을에서 인기가 높았다.

열일곱에 시작한 일을 일흔여덟까지 놓지 않았던 손 대표에게 성냥공장은 전 생애를 바친 일터였고 사업이었고, 그의 보람이었다. 이미 문을 닫은 자신의 일터가 한때는 향토기업으로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일터였다는 사실을 그는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인근 금성면으로 귀촌해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도 의견을 보탰다. 귀촌 8년 차, 그도 의성사람이 다 된 걸까.

“’나만의 성냥’ 만들기 체험 같은 걸 생각해 볼 수 있지. 텔레비전이 나오고도 신문과 책은 살아남았고,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는 아련한 추억이야. 주 소비계층 3, 40대 이상과 베이비붐 세대를 고려해 보면 이런 사업의 전망은 있지 않을까?

굳이 거액을 들여 박물관과 체험관을 짓지 않아도 최소한의 인력으로 공장을 돌리며 주 2회 정도라도 공정을 공개하고 체험 공간으로 개방하여 문화 공간으로 만드는 거, 반드시 힘들기만 할까?”

일본의 성냥공장도 중국산에 대응해서 고급화와 관광 상품화 전략으로 재활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성냥’을 단순히 불붙이는 도구가 아니라 ‘시대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전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우리는 손 대표에게 머지않은 장래에 소망하시는 대로 성광성냥이 거듭나리라고 위로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글쎄, 시답잖은 방문객이라도 그에겐 우리의 관심과 공감이 위안이 됐을까. 이곳을 다시 찾는 날에는 향교길 근처가 외지의 방문객으로 북적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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